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겨요.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이해일까, 인정일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인정이에요. “야, 너 말 되게 잘한다.” “너 진짜 많이 아는구나.” 이 한 줄이 그렇게 달아요. 제가 디자인 업계에서 오래 일을 한 편인데, 거긴 은근히 이런 문화도 있어요. 무언가를 ‘해석’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문화. 영화든 전시든 브랜드든, “이건 사실 이런 맥락이 있고”를 잘 풀어내면, 다들 고개를 끄덕여요. 그 끄덕임이 제겐 일종의 박수처럼 들렸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박수가 좋았고, 그 박수를 더 안정적으로 얻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해’가 아니라 ‘이해한 척’을 연습하게 됐습니다. 되게 쓸모없는 재능이죠.
근데 인간 뇌 자체가 사실 이런 “척”에 꽤 취약해요. 우리가 어떤 정보를 접할 때, 그게 쉽게 처리되면, 그러니까 읽히고, 들리고, 리듬이 착착 붙으면, 우리는 그걸 더 호감 있게 느끼고 더 그럴듯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어요. 인지심리학에서는 이걸 처리 유창성, Processing Fluency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유창하게 말하면, 좋은 것 같고 맞는 것 같다”예요. 그리고 이 유창성은 ‘진실 판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어요. 글씨가 잘 보이거나 문장이 매끈하면, 내용이 같은데도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식으로요.
여기서 포인트는 “사람들이 속는다”가 아니라 “나도 속는다”예요. 제가 어려운 말을 찾는 이유는 사실 역설적으로, 제 말을 더 단단해 보이게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청자 입장에서도, 어렵지만 리듬이 매끈하면, 이해가 아니라 “이해한 느낌”이 먼저 와요. 그 느낌은 꽤 강력해요. 우리가 영화 볼 때도 그렇잖아요. 어떤 영화는 진짜 내용을 다 이해한 건 아닌데, 음악과 편집과 대사의 리듬이 너무 좋아서 “나 지금 뭔가 대단한 걸 본 것 같아”라는 감각이 남아요. 예를 들면 ‘테넷’ 같은 영화요. 보고 나와서 “나는 이해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수상합니다. 그게 바로 이해가 되나요? 근데 그 수상한 사람이 저였을 때가 많아요. 이해를 했다는 사실보다, 이해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거죠. 반대로 어떤 영화는 내용은 엄청 탄탄한데, 리듬이 투박해서 사람들이 “어렵다”라고 할 때가 있죠.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처리의 문제일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문장을 매끈하게 만들면, 내용이 조금 비어 있어도 사람 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너무 빨리 배워버렸던 것 같아요. 참, 이런 거 빨리 배웁니다.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정의는 불명확한데 기분은 고급스러운 문장”을 만나면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올라와요. 하나는 감탄. 와, 진짜 멋있다. 다른 하나는 불안. 나 이거 이해 못 했는데, 이해한 척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책이나 강연에서 그런 문장이 나오면, 사람들은 희한하게 질문을 안 해요. 다들 끄덕입니다. 그 끄덕임이 이해인지, 방어인지, 그냥 예의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끄덕입니다. 그 장면이 저는 너무 웃기면서도 무서워요. 왜냐면 저도 거기 섞여 있고, 심지어 저는 그 끄덕임을 유도하는 문장을 만들 때가 있었으니까요. “정말 깊은 통찰이네요”라는 말이, 사실은 “지금은 질문하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아요”로 번역되는 순간들. 저도 그 번역기를 돌려본 적이 있습니다.
대중문화 속 ‘똑똑한 캐릭터’도 비슷해요. 셜록 홈즈, 닥터 하우스, <The Mentalist>의 패트릭 제인이나 <SUITS>의 마이크 로스. 다들 빠르게 말하고 어려운 단어를 툭툭 던져요. 주변 인물들이 “와…” 하고 얼어붙죠. 그 얼어붙음은 존경처럼 보이는데, 가끔은 그냥 “지금 끼어들면 내가 바보 될 것 같아서 입을 닫는” 침묵일 수 있어요. 저는 그걸 알면서도, 그 장면을 흉내 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가 말하는 동안 상대가 잠깐이라도 조용해지는 그 기분. 되게 초라하게 말하면, 저는 누군가의 침묵을 사서 제 자존심을 달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더 초라한 건, 그 침묵이 ‘관심’이 아니라 ‘회피’였다는 걸 나중에 알 때예요. 그때는 집에 와서 갑자기 집안 정리를 합니다. 정리라도 해야 마음이 잠깐 정돈되거든요.
그리고 여기서 진짜 아픈 게 하나 더 있어요. 우리는 복잡한 걸 “설명할 수 있다”고 쉽게 착각합니다. '설명의 깊이에 대한 착각(Illusion of Explanatory Depth, IOED)’이라는 건데, 로젠블릿 Rozenblit과 케일 Keil의 연구가 이 현상을 잘 보여줘요.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이 꽤 잘 안다고 평가해놓고, 실제로 단계별 설명을 시키면 “어… 그게…” 하면서 자신감이 뚝 떨어집니다. 저는 이걸 제 삶에서 너무 자주 재현해요.
예를 들어 누가 “그럼 그거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물으면, 저는 1초 동안 뇌가 정지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0.5초 안에 두 갈래 길이 열려요. 하나는 정직하게 말하기. “나도 사실 정확히는 몰라.” 다른 하나는 연막 치기. “이건 맥락적으로 봐야 하는데…”로 시작해서, 상대가 질문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향이죠. 저는 솔직히 연막을 더 자주 썼어요. 왜냐면 정직은 느리고, 연막은 즉효성이 있거든요. 연막을 치면, 상대는 대개 더 묻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그 순간 되게 ‘안전’해져요. 하지만 그 안전은 오래 안 갑니다. 밤에 이불 속에서 갑자기 떠올라요. “너 방금 도망갔지.” 진짜 앎은 후유증이 있고, 아는 척은 즉효성이 있어요. 저는 그 차이를 너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도망치지 않고 인정하는 연습을 해요. 이것도 말장난 같죠? 근데 진짜로요.
철학 이야기를 굳이 꺼내자면, 저는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같은 말을 좋아하면서도, 그걸 또 ‘멋있는 문장’으로 소비할 때가 있어요. 웃기죠. 무지를 인정하자는 문장을 들고, 무지를 숨기려고 멋을 부리는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더 비참해지는 순간도 있어요. “내가 지금 이걸로 잘난 척하는 거 알아. 근데 못 멈추겠어.” 이런 마음. 그게 바로 저예요. 저는 제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가끔은 제가 저를 더 싫어져요. 알면 좀 나아져야 하잖아요? 근데 알기만 하고 계속 그러면, 그건 그냥 ‘자기 관찰을 빙자한 자기 방치’거든요. 관찰만 하면 뭐해요. 관찰한 다음에 또 똑같이 살면, 그건 그냥 고급스러운 자기합리화지.
그래서 오늘은 자책으로 끝내고 싶진 않아요. 허영심은 종종 결핍의 다른 이름이에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는 자연스러워요. 문제는, 그 결핍을 핑계로 타인을 압도하는 언어를 습관처럼 쓰는 거죠. 저는 그걸 줄이고 싶어요. “나도 불안해서 그랬어”라고 말하고 끝내면 쉬운데, 쉬운 결론은 늘 저를 같은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딱 한 가지는 책임지려고 해요. 내 결핍이 있더라도, 대화의 공간을 내가 무너뜨리진 말자.
여기서 도움이 되는 태도가 지적 겸손, Intellectual Humility예요. 이게 “겸손해져라” 같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꽤 실용적인 기술에 가깝습니다. 내가 아는 것의 한계를 알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업데이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 저는 이걸 멋으로 갖고 싶지 않고, 진짜 습관으로 만들고 싶어요. 물론, 저 같은 인간이 습관을 만든다? 말만 들어도 신뢰가 떨어지죠. 저도 알아요. 그래도 해보려고요. 제가 워낙 끊을 게 많아서, 하나쯤은 끊어봐야지 않겠어요. 노담처럼요. ‘노척’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요즘 제가 저한테 거는 규칙이 있습니다. 저는 규칙을 좋아해요. 규칙이 있으면, 제가 덜 생각해도 되거든요. 감정이 흔들릴 때는 생각이 아니라 자동화가 필요할 때가 있어요.
첫 번째는, 어려운 말을 썼으면 바로 한 문장으로 다시 말해 보는 거예요. 진짜 유치하게. “처리 유창성”이라고 말했으면, 바로 “쉽게 읽히면 더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로 바꿔 말해요. 이걸 하면 제가 제일 먼저 무너집니다. 왜냐면, 갑자기 제 문장이 맨얼굴이 돼요. 꾀죄죄한 얼굴. 조명 없는 얼굴. 그리고 그 맨얼굴을 견디는 시간이 은근히… 진짜 공부에 가깝더라고요. 멋은 없는데, 몸은 편해져요. 두꺼운 외투를 벗으면 추운데, 대신 숨은 쉬어집니다.
두 번째는, 설명 테스트예요. 예시 하나를 들 수 있는지, 그리고 반례 하나를 들 수 있는지. 예시는 누구나 들어요. 반례가 어렵거든요. 반례를 말할 수 있으면, 내가 이걸 교조적으로 외운 게 아니라 상황을 보고 있다는 뜻이 되더라고요. 예를 들어 “유창한 말은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라고 했으면, “근데 너무 유창하면 광고 같아서 오히려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반례를 붙이는 거죠. 이렇게 하면, 내 말이 덜 독단적이 됩니다. 독단은 멋있어 보이는데, 대화를 죽여요. 저는 대화를 살리고 싶어요.
세 번째는, “모른다”를 멋으로 쓰지 않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저는 무지합니다”를 또 하나의 똑똑함처럼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거 정말 고급 스킬입니다. 겸손으로 잘난 척하기. 저도 그거 해봤어요. “제가 부족해서요”라고 말해놓고 속으로는 “방금 나 겸손했지?” 하고 점수 주는 거. 너무 웃기죠. 그래서 저는 그냥 이렇게 말하려고요. “그건 아직 제 언어로 설명을 못 하겠어요. 대신 제가 이해한 만큼만 말해볼게요.” 멋은 줄어드는데, 신뢰가 남아요. 그리고 신뢰는 생각보다 오래갑니다. 저는 이제 그 오래가는 걸 갖고 싶어요. 짧게 반짝이는 건, 요즘 이 세상에 너무 많아서요.
참고로 오늘 글에서 말한 연구와 개념들은 이런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어요. 처리 유창성이 판단과 평가에 영향을 준다는 흐름은 Reber, Winkielman, Schwarz(1998)와 Alter & Oppenheimer(2009) 같은 정리에서 자주 다뤄지고, 유창성이 진실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실험도 보고되어 있습니다. 설명 깊이의 환상은 Rozenblit & Keil(2002)의 연구가 대표적이고, 지적 겸손은 자신의 지적 한계를 인식하고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로 정리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생각 드실 수도 있어요. “근데 말야, 어차피 당신 또 잘난 척할 거잖아.” 네, 할 거예요. 저는 잘난 척을 완전히 끊진 못할 겁니다. 다만, 제가 뭘 숨기려고 그랬는지는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뒤처질까 봐, 가벼워 보일까 봐, 별거 아닌 사람으로 보일까 봐. 저는 그 두려움을 ‘어려운 말’로 덮어왔어요. 근데 덮는 건 해결이 아니더라고요. 온갖 잡동사니를 이불로 덮어버린다고 방이 깨끗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언젠가는 이불을 들춰야 합니다. 저는 요즘 그걸 조금씩 들추는 중이에요. 양말이 나오고, 과자봉지가 나오고, 케이블이 나오고, 제 자존심이 나옵니다. 보기 싫은데, 웃기기도 해요. 아, 이게 내 방이구나. 이게 내 머리구나. 방이 더럽다고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어쨌든 청소는 내가 해야 하잖아요.
“그래도 어려운 말이 주는 쾌감이 있잖아”라고 생각하셨죠. 저도 알아요. 어려운 단어 하나 딱 던졌을 때, 상대 눈이 잠깐 커지는 그 순간. 그거 되게 달아요. 그런데 그 달콤함이 계속 필요해지는 순간이 와요. 그때부터는 말이, 대화가 아니라 간식이 돼요. 당이 떨어질 때마다 더 센 걸 찾게 돼요. 저는 그 사이클을 끊고 싶어요. 완벽히 끊진 못하겠죠. 인간이니까. 다만, 제가 뭘 숨기려고 그랬는지를 알고 나면, 적어도 “아, 지금 나는 또 과자 먹으려 한다”를 알아차릴 수는 있더라고요. 그 알아차림 하나로, 말하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져요. 이해는 느리지만, 대신 그건 진짜에 가까울 거예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남길게요.
당신이 ‘어려운 말’을 찾는 순간, 사실은 어떤 마음을 가리고 있나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지, 뒤처질까 봐 무서운 마음인지,
아니면 그냥 조용히 존중받고 싶은 마음인지.
우리 각자 그 답을
조금씩만 생각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