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어요. 저는 고립을 “선택”한 느낌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시스템이 셧다운되는 느낌이었어요. 컴퓨터도 열 받으면 팬이 미친 듯이 돌다가, 어느 순간 화면이 꺼지잖아요. “저 이제 더는 못 하겠는데요” 하면서. 저는 그게 사람 앞에서 자주 일어나요. 다정하고 유연한 정원사처럼 보이려고 애쓰는데, 정작 제 안쪽은 굉장히 방어적이고, 과열되면 바로 차단 버튼부터 찾는 타입이거든요. 새해 시작할 때 특히 그렇더라고요. 연초에는 다들 “새로 시작” 같은 말을 하지만, 사실은 작년의 피로가 아직 다 안 빠졌잖아요. 정리하고 싶은 마음은 큰데, 몸이 따라주질 않으니까 마음이 먼저 흙탕물이 돼요.
흙탕물 얘기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요즘 <솔로지옥>의 홍진경님 어록이 엄청 뜨더라고요. 이 모든 것이 다 최무리수씨 덕분이겠죠. 제작진은 무슨 복이에요, 정말. 최미나수 씨가 멘붕이 와서 막 여기저기 자기 속 얘기를 하고 이런 상황이 있었죠. 그때,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살면서 멘탈이 나가고 그런 시기에는,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릴 필요가 있다.
맞아요. 너무 복잡하고 힘들 때는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어요. 가만히 있을 줄도 알아야 해요. 급할수록 말부터 하면 안 되고, 억울할수록 설명부터 하지 말고, 화날수록 결정부터 하면 안 됩니다. 이 문장들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흙탕물이란 게 그렇잖아요. 흔들면 더 흐려지고, 더 오래 가요. 근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죠. 흔들수록 더 흔들고 싶어져요. 불안하니까.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흙탕물 상태에서 이런 걸 자주 해요. 급할수록 말부터 하고, 억울할수록 증명부터 하고, 화날수록 결론부터 내려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주도권을 잡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 주도권이 대개는 나중에 후회로 돌아오죠. 말이 앞서서 더 큰 오해를 만들고, 증명이 집착이 되고, 결론이 폭발이 되는 방식으로요.
하지만 이런 얘기도 많이 들립니다. 고립은 무조건 나쁘다는 얘기, 저도 많이 들었거든요. “힘들수록 사람을 만나야지.” “얘기해야 풀리지.” 이것도 맞는 말이에요. 근데 그게 항상 작동하진 않더라고요. 특히 “사회적 뇌”가 과열된 상태에서는요. 사회적 뇌라는 말이 좀 거창하지만,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 평가, 배제, 소속감 같은 것들을 처리하는 시스템. 이게 과열되면, 누군가를 만나서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그 만남 자체가 또 하나의 자극이 돼버려요. 그리고 자극이 자극을 부르다 보면, 나는 나를 지키려고 더 세게 닫아버리죠.
이걸 뇌과학에서 꽤 직설적으로 보여준 연구가 있어요. 사람들을 MRI에 넣어두고, “사이버볼”이라는 가상의 공놀이를 시켜요. 처음엔 잘 끼워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만 빼고 공을 주고받게 만드는 거죠. 진짜 유치하죠. 근데 인간은 그런 유치함에 진심이잖아요.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괴로움이 올라가고, 뇌에서는 전측 대상피질(ACC) 같은 영역의 활동이 증가하는데, 이게 물리적 통증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호랑 닮아 있다는 보고가 나와요. 사회적 배제는 말 그대로 “고통”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거죠. 그 뒤로도 사회적 고통과 물리적 고통이 일부 겹치는 기제를 공유할 수 있다는 관점이 계속 정리되어 왔고요. 그러니까 내가 사람을 피한 게, “마음이 유난해서”라기보다 “통증을 회피하는 자동 반응”일 수도 있는 거예요. 통증 앞에서 움츠러드는 걸 두고 성격 탓 하긴 어렵잖아요. 손이 뜨거우면 반사적으로 빼는 것처럼요.
우리가 흔히 아는 많은 이야기들에서 “고립이 기본값인 주인공”을 만납니다. 결핍이 있는 주인공에게 우리가 끌리는 이유가, 그 사람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생존 방식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저는 가끔 제 고립도 그런 느낌이에요. 남들처럼 사람 만나서 풀고 싶고, 즐겁게 감정 공유하고 싶은데, 제 시스템은 그게 바로 안 돼요. 그래서 일단 내 마음속에 있는 나만의 다락방으로 들어가요. 아무도 들이지 않아요. 택배 문자만 와요. “문 앞에 놓고 갑니다.” 네, 그게 제 사회적 유대의 하이라이트일 때도 있어요. 웃기죠. 근데 이 웃음이 사실은 생존의 웃음이에요.
옥시토신 얘기를 살짝만 해볼게요. 옥시토신은 흔히 “사랑 호르몬” 같은 말로 소비되는데, 사실은 사회적 유대와 스트레스 반응 쪽에서 많이 연구돼요. 흥미로운 건, 옥시토신 수용체 유전자(OXTR)의 변이와 사회적 지지의 효과가 상호작용해서 스트레스 반응을 완충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OXTR의 특정 다형성과 “사회적 지지가 있을 때 스트레스가 덜한 양상”을 함께 본 연구가 있고요.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건, 이게 “유전자 때문에 나는 회피형 확정” 이런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힌트를 하나 더 얻는 거죠. 누군가는 같은 상황에서도 지지의 손길이 바로 들어오면 안정이 되는데, 누군가는 그 손길조차 자극이 되어 버려서 더 닫힐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러면 “왜 나는 사람한테 위로를 받으면 더 피곤해지지?” 같은 질문이 조금 덜 자책으로 가게 돼요. 아, 이게 그냥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시스템의 반응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저는 고립을 이렇게 정의해보기로 했어요. 고립은 종종 성격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격리”라고요. 일종의 응급 스위치. 과열된 사회적 뇌를 잠깐 끄는 장치. 실제로 사회적 철수라는 행동이 처음엔 적응적일 수 있지만, 과도하거나 만성화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관점도 있어요. 그러니까 “연락 끊고 살아버려”가 아니라 “흙탕물일 때는 잠깐 고립하고, 맑아지면 다시 연결하는 기술을 갖추자”는 거예요. 고립을 악으로만 보지 말고, 고립을 ‘기술’로 만들자는 거죠.
기술 얘기 나온 김에, 제가 실제로 쓰는 방식이 있어요. 저는 멘탈이 나가면 원래 “설명병”이 도져요. 억울할수록 말이 길어지는 병.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제가 저한테 내리는 첫 번째 처방은 이거예요. “추가로 흐리는 행동 금지.” 흙탕물인 날에 제가 하면 100퍼센트 후회하는 행동들이 있거든요. 폭주 메시지, 새벽의 장문 카톡, 단톡방에 농담처럼 던지는 하소연, 의미심장한 문장 올리기, 그리고 ‘결정’이라는 이름의 폭발. 손절, 퇴사, 관계 정리, 폭로, 선언. 이런 건 흙탕물 상태에서 하면 대개 망해요. 왜냐면 그때의 뇌는 정확한 판단보다 “즉각적 해소”를 원하거든요. 당장의 시원함이 미래의 대가를 가리는 거죠.
두 번째는 시간을 정하는 거예요. 고립을 결심하면 저는 기간을 아주 작게 잡아요. “오늘 하루만.” 혹은 “지금부터 여섯 시간만.” 이게 되게 중요해요. 고립이 생존 전략이 되는 순간과, 고립이 습관이 되는 순간은 여기서 갈리거든요. 기간이 없으면 고립은 끝이 없어져요. 그리고 끝없는 고립은 회복이 아니라, 회피의 동굴이 되기 쉬워요. 기간이 있으면 고립은 “잠깐의 격리”가 돼요. 내일의 나에게 통제권을 넘기는 방식이죠.
세 번째는 몸이에요. 저는 흙탕물 상태에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면 더 망하더라고요. 생각은 이미 과열된 상태니까요. 그래서 몸부터요. 샤워, 정리, 따뜻한 차, 호흡. 아주 유치해 보이죠. “물 마시면 낫나요?” 네, 낫는 건 아니고요, 최소한 더 망가지는 건 막아줘요. 몸이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으면, 뇌의 경보가 조금 내려오거든요. 그때부터 흙탕물이 아주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해요.
네 번째는 깨끗한 물을 조금씩 붓는 거예요. 여기서 “깨끗한 물”은 거창한 해답이 아니에요. 산책, 책, 음악, 손작업. 저는 뜨개를 할 때가 많아요. 뜨개는 진짜 희한해요. 생각이 복잡할수록 손은 단순한 패턴을 반복하잖아요. 코를 하나씩 걸고, 실을 당기고, 또 걸고. 그 반복이 마음을 설득하진 않는데, 마음의 흙을 가라앉히는 데는 도움이 돼요. 마치 누군가 내 옆에서 말 없이 물을 갈아주는 느낌. 저는 그걸 “내가 나를 기다려주는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생존을 위해 고립을 선택했다면, 그 고립 안에서 나를 방치하면 안 되고, 나를 돌봐야 하거든요.
다섯 번째는, 이게 진짜 핵심인데요. 대화를 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아무나”가 아니라 “선별해서, 시간을 잡고” 해야 돼요. 저는 흙탕물일 때 아무나 붙잡고 얘기하면 더 흐려지더라고요. 말하는 동안 내 감정이 재생되고, 상대의 반응에 다시 상처받고, 오해가 늘어나요. 그래서 저는 차라리 고립을 먼저 하고, 흙탕물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딱 한 사람만 잡아요. 그리고 목적을 하나만 정해요. 해결이 아니라 정리. 이 문장이 꽤 쓸모 있어요. “지금은 해결책보다 정리가 필요해.” “오늘은 내가 흙탕물이라서, 판단은 내일 할래.” 이런 말은 관계를 끊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살리는 말이 되기도 하거든요. 물론 이 말조차도 지금은 못 하겠다 싶으면, 그냥 나중에 해도 돼요. 우선은 생존이니까.
여기서 제가 하나 고백하자면요. 저는 예전엔 고립을 하고 나서 꼭 죄책감을 느꼈어요. “내가 너무 차갑나?” “내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나?” “나 외골수인가?” “내가 너무 성격이 모났나?” 이런 생각. 근데 뇌가 사회적 배제를 통증처럼 처리할 수 있다는 얘길 알고 나서,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도 방향이 바뀌었어요. “나는 왜 이러지?”에서 “아, 지금 내 시스템이 과열 상태구나”로. 그 차이는 커요. 전자는 나를 공격하고, 후자는 나를 치료하거든요.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 줄도 알아야 해요. 급할수록 말부터 하면 안 되고, 억울할수록 설명부터 하지 말고, 화날수록 결정부터 하면 안 됩니다. 너무 복잡하고 힘들 때는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해요. 그 고립이 누굴 벌주기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거라면요. 고립은 성격이 아니라 응급 스위치일 수 있어요. 그리고 스위치를 내렸다면, 그 안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일을 같이 해야 해요. 흙탕물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그때 깨끗한 물을 조금씩 넣어주면 돼요.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몰입할 만한 무언가를 찾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흙탕물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관계라는 물이 다시 맑아질 여지가 생긴다는 거죠. 정원도 마음도, 가라앉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지금 마음 상태가 흙탕물이라면, 나를 위해 조금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결론을 내리지 않는 쪽으로.
오늘은 설명을 미루는 쪽으로.
오늘은 잠시 사라져도 되는 쪽으로.
대신, 내가 나를 방치하지는 않는 쪽으로 살짝 틀어보는 거예요.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