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파국화(Catastrophizing)'라고 명명합니다.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마치 필연적인 결말인 것처럼 믿어버리는 거죠. 인지심리학자 아론 벡은 이런 인지 왜곡이 우리를 우울과 불안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이 '파국화'가 단순히 부정적인 습관이 아니라, 나름대로 나를 보호하려는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상처받지 않으려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고 미리 예방주사를 아주 아프게 놓는 거죠. 하지만 이 예방주사가 너무 잦아지면 우리 삶 자체가 병원이 되어버리잖아요. 끊임없이 결말을 상상하고, 그 결말이 실패일까 봐 걱정부터 하게되는거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이 끝끝내 아무런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지 못할 거라는 결말을 혼자 써 내려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몸을 사리게 돼요. "어차피 안 될 건데 뭐 하러 힘을 빼?"라며 나 자신을 주저앉힙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남들에게 비춰질 내 모습이에요.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저거뿐이야?'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나를 알리는 데 망설이게 되고, 더 나은 작업을 위해 밤잠 설쳐가며 몸부림치는 그 뜨거운 과정조차 숨기게 되더라고요. 쿨해 보이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요,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내가 이만큼이나 간절하다는 걸 들켰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땐 정말 도망칠 곳이 없을 것 같았거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망설임'은 사실 정중하게 표현된 '공포'에 가까워요. 꽤나 많은 고민을 해왔다고 자부했지만, 가만히 되돌아보면 정말 내가 무언가를 향해 온 몸을 던져서 달려본 적이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 그냥 해보자!" 이런 결단이 저에겐 너무나 희귀한 일이었어요. 언제나 여러 가지 가정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하고, 망설이다가 정작 '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죠. 인지과학에서는 이걸 '분석 마비(Analysis Paralysis)'라고 불러요. 너무 많은 선택지와 위험 요소를 고려하느라 뇌의 전두엽이 마비되어 버리는 현상이죠. 우리는 완벽한 선택을 하고 싶어 하지만, 실상은 완벽한 선택을 하려는 강박 때문에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는 가장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우리 앞에 놓인 길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인생이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라면 우리는 두려울 게 없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어디로든 핸들을 꺾을 수 있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죠. 그래서 매 순간 "이 길이 맞나? 사고가 나면 어쩌지?" 하는 현기증을 느껴요.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 현기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주체라는 증거라고 했어요. 자유롭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고,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잖아요. 수영장 물이 차가운지 따뜻한지는 발가락이라도 담가봐야 아는 건데, 저는 물가에 서서 물의 비열과 기온, 내 체온 변화에 따른 심장마비 확률만 계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남들이 시원하게 첨벙거리며 노는 동안 저는 쭈뼛쭈뼛 거리기만 하다 돌아오는 거죠. 이런 저의 기질은 미래에 대한 지독한 갈구로 이어지기도 해요. 내일을 알 수 없기에 너무 두렵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 베일을 벗겨보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매년 토정비결을 보고, 신점을 보고, 사주를 보고, 신년운세를 확인하죠. 저도 예외는 아니에요. "올해는 물을 조심해라" 혹은 "사람을 조심해라" 같은 말 한마디에 제 일 년의 행동 반경이 결정되기도 하거든요.
한번은 운세 앱으로 신년운세를 확인해봤는데 "올해는 이동수가 좋지 않으니 웬만하면 자리를 지키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 후로 저는 여행 계획을 다 취소하고, 심지어 집 앞 공원에 산책 나가는 것조차 망설여지더라고요.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요? 내 삶의 주권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 아니 그냥 프로그램이 던진 말 한마디에 넘겨준 꼴이잖아요.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를 미신과 점술의 포로로 만듭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는 게 있잖아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그 원리요. 우주의 아주 작은 단위조차 확정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 복잡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단 몇 마디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겠어요?
제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과 불안에 잠식될 때면 찾는 저만의 탈출구가 있어요. 바로 애니메이션이에요.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오리온과 어둠(Orion and the Dark)>이라는 작품을 봤는데, 보는 내내 "어? 저건 그냥 나잖아!" 싶어서 소름이 돋더라고요. 주인공 오리온은 정말 지독한 겁쟁이 소년이에요. 얘는 초등학생인데 벌써 삶의 모든 순간에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여요. 학교에서 질문에 대답했다가 틀려서 친구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현장 학습을 갔는데 버스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심지어는 핸드폰 전파가 뇌에 영향을 주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스케치북에 자기만의 공포 리스트를 빼곡히 적어요.
그 중에서도 오리온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어둠'이에요. 매일 밤 불을 끄는 순간 시작되는 그 검은 공포 때문에 오리온은 매번 비명을 지르죠. 그러다 결국, 매일 밤 오리온의 비명을 견디다 못한 '어둠' 본인이 직접 나타납니다. 어둠은 덩치 큰 검은 망토를 두른 실체지만, 목소리는 아주 다정하고 유머러스해요. 그는 오리온에게 "내가 얼마나 근사하고 유익한 녀석인지 보여줄게"라며 밤의 세계로 여행을 제안하죠. 그 여행에서 오리온은 '잠', '불면', '조용한 소리’, ‘꿈’ 같은 밤의 정령들을 만나요. 그리고 자기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어둠이 없으면, 꽃도 쉴 수 없고 사람들도 꿈을 꿀 수 없으며, 아름다운 은하수도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죠.
그 영화의 중반부, 제 심장을 툭 치고 지나간 대사가 하나 있어요.
"Sometimes, you just need to feel the fear."
때로는 그냥 그 두려움을 느껴야만 한다는 거예요. 저는 이 문장을 듣고 한참을 멈춰 있었어요. 지금까지 저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왔거든요. 미리 계획을 철저히 짜고,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운세를 보고, 도망을 쳤죠. 저에게 두려움은 빨리 해치워야 할 숙제이거나, 제거해야 할 장애물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둠이 오리온에게 말한 건,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그 두려움 속에 그냥 머무는 법'이었어요.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정서적 성숙의 척도라고 말했는데, 저는 이 말을 조금 비틀어 '두려움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고 믿어요.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뇌과학적으로 보면 두려움은 우리 몸의 '생존 엔진'이 아주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다는 신호거든요. 우리가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일 때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마르는 건, 뇌가 "야, 지금 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도전이 시작되고 있어! 모든 감각을 깨워!"라고 소리치며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고귀한 생존 에너지를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환원해서 낭비해버리죠. 만약 우리가 그 두근거림을 '공포'가 아니라 '각성'이나 '몰입의 전조'로 해석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인생의 결말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중간 과정의 고통과 불안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미리 알고 극장에 들어가는 사람이 과연 그 영화의 서스펜스와 감동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요? 인생의 묘미는 '반전'과 '의외성'에 있는데, 우리는 자꾸 스포일러를 찾아 헤매요.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결말을 알지 못한 채로 첫발을 내딛는 것에 있습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용기란 압박 아래에서의 우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압박이란 바로 '두려움'일 거예요.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동작이죠. 진짜 용기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한 걸음을 떼는 거예요.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 이론을 들어보셨나요? 사람이 어떤 일에 완전히 빠져들 때,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몰입의 상태는 너무 쉬운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보다 약간 더 높은 수준의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할 때 나타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이 동반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 당신이 지금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느끼는 그 두려움은, 사실 당신이 곧 '몰입'의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신호일지도 몰라요.
이제 다시 제 핫팩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저는 여전히 핫팩을 바로 버리지 못해요. 하지만 이제는 제 그런 모습을 보며 자책하지 않아요. "아, 내가 또 내 자유의 현기증을 느끼고 있구나. 내가 이 세상을 참 소중하고 세심하게 대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깁니다. 커터칼을 쓸 때의 공포도, 신년 운세의 찝찝함도 이제는 제 인생이라는 풍경화 속에 찍힌 작은 점 정도로 여겨요. 풍경화에 그늘이 있어야 빛이 더 선명해 보이듯, 우리 삶에 두려움이라는 그늘이 있어야 평화라는 빛도 제 가치를 발휘하는 거니까요.
두려움은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냥 그 두려움을 오롯이 느껴야만 해요. 차가운 겨울바람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아야 봄의 온기를 온전히 감각할 수 있듯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어두운 감정들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단단해집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정복하거나 박멸해야 할 적이 아니에요. 그저 길을 가다 만나는 소나기 같은 것이죠. 비가 오면 잠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가도 되고, 급하다면 좀 젖으며 뛰어가면 돼요. 젖는다고 해서 우리가 녹아 없어지지는 않거든요. 말리면 그만이고, 그 비 덕분에 우리 마음의 정원에는 더 푸른 싹이 돋아날 거예요.
우리가 정말로 할 일은 내일의 결과를 점치는 게 아니에요. 대신 어떤 내일이 오더라도 그 내일을 살아낼 수 있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채비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미리 알면 덜 두려울 것 같지만, 사실 더 큰 두려움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옵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죠.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 두려움을 통과해본 경험이야말로, 우리를 그 어떤 운세보다 강력하게 지켜주는 갑옷이 될 거예요. 그러니 오늘의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도록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과 다정한 인사를 나누세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인 '대비'입니다.
오늘 당신의 밤은 어떤가요? 혹시 오리온처럼 어둠이 무서워 불을 끄지 못하고 있나요? 아니면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의 걱정 때문에 이불 속에서 자꾸만 뒤척이고 계신가요? 괜찮아요. 그 두려움을 억지로 쫓아내려 애쓰지 마세요. 그냥 "아, 나 지금 좀 무섭네. 근데 이건 내가 내일도 정말 잘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라고 스스로를 인정해주세요. 그리고 그 두려움과 함께 잠을 청해보세요. 어둠이 있어야 별이 보이듯, 두려움이 있어야 우리의 용기도 비로소 빛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어둠' 너머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선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오리온이 어둠과 친구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올랐던 것처럼요. 두려움은 우리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가장 높은 계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마세요. 여러분 곁에는 제가 있고, 또 여러분의 용기를 믿는 수많은 마음이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혹시 저처럼 밤에 인덕션 전원이나 가스 밸브를 세 번씩 확인하고 있나요? 저는 확인하고 나서도 불안하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그 다음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요. “네 번 이상은 병이다.” 그리고 침대로 갑니다. 두려움이 완전히 꺼지지 않아도요. 어차피 두려움은 가끔 잔불처럼 남아 있잖아요. 잔불이 남는다고 해서 내가 캠핑장에서 못 자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 두려움이, 어둠이, 옆에서 ‘톡톡’거릴 때도, 내가 해야 하는 생활은 계속 해보는 거예요.
오늘 이 글을 읽으면서 혹시 “그래도 두려움은 싫은데요” 생각하셨을 수도 있어요.
당연하죠. 저도 싫어요.
근데요,
두려움이 있는 날에도
우리는 살고, 만들고, 웃고, 밥 먹고, 사랑하고, 또 작업도 하잖아요.
가끔은 그냥 두려움을 느껴야만 해요.
그리고 그 상태로도,
우리는 살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