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새해에 유독 소원에 진심일까요. 12월 31일 23시 59분과 1월 1일 0시 1분 사이에 물리적으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통장 잔고가 리셋되거나, 갑자기 성숙해지거나, 어깨가 넓어지거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근데도 우리는 새해를 ‘새로운 시작’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죠. 재미있는 건, 이런 시점이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을 조금 당긴다는 연구가 있어요. 새해, 생일, 이사, 새 학기 같은 ‘시간의 경계’가 생기면 사람들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 같은 마음이 올라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새해가 되면 헬스장이 붐비고, 다이어트 검색이 폭발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2월이 되면 조용해진다는 거고요. 우리는 달력이 주는 착각을 알면서도, 그 착각을 빌려서라도 움직이고 싶은 거예요.
소원을 비는 행위 자체도 묘하게 기능이 있어요. 성당에 가든, 절에 가든, 일출을 보러 가든, 케이크에 촛불을 켜든, 그 순간에는 다들 아주 진지해지잖아요. 저 어릴 때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 끄기 직전에 엄마가 “소원 빌어, 빨리”라고 하면, 저는 진짜 뇌가 과열됐거든요. 3초 안에 내 인생의 핵심 욕망을 압축해서 제출해야 하는 시험 같은 느낌. 그때는 늘 게임기나 장난감이었고요. 지금은 “제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게임기보다 훨씬 비싸진 물질적인 욕망이 꿈틀대고 있어요.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근데 의식이라는 게, 겉으로는 우습고 유치해 보이는데도 마음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할 때가 있죠. 반복되는 동작이 불안을 낮추고, 집중을 도와서 수행을 더 잘하게 만든다는 연구들도 있어요.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이 생기면 마음이 진정되는 거거든요. 소원도 비슷해요. 소원은 현실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온도를 조절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겨요. 소원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결핍을 느끼는 것’일까요. 보통은 둘 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화, 건강, 행복, 사랑 같은 말을 계속 빌어요. 우리가 모두 비슷한 인간이라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네 가지가 늘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평화가 부족하니까 평화를 빌고, 건강이 불안하니까 건강을 빌고, 사랑이 불확실하니까 사랑을 빌고. 소원은 예쁘게 포장된 자백이에요.
저도 예전에는 새해마다 목표를 적었어요. 운동 주 5회, 작업물 몇 개, 매출 몇 퍼센트. 근데 어느 해는 목표를 쓰다가 손이 멈췄습니다. ‘이거 내가 진짜 원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목표는 성실한 척하기 되게 좋아요. 체크리스트는 나를 유능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주거든요. 근데 소원은 좀 쪽팔립니다. 목표는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데, 소원은 보여주기 어렵죠. 소원은 내 속을 너무 정확히 드러내니까.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부터 목표보다 소원을 먼저 적기 시작했어요. 소원을 적고 나면 목표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요. 순서가 바뀌니까 말투도 바뀌어요. “해야 한다”가 아니라 “살고 싶다”로.
돌탑이라는 게 되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합니다. 산에 가면 누군가가 쌓아놓은 돌탑이 가끔 있는데, 그걸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거 쌓은 사람, 그 순간엔 엄청 진지했겠다.’ 돌 하나 고르고, 균형 보고, 손 떼는 그 찰나에 마음이 들어가요. 돌탑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느린 메시지예요. “나 여기 왔다”라는 흔적이면서, “나 이렇게 쌓아올렸다”라는 선언이죠.
저는 작업을 하면서 돌을 더 자주 떠올려요. 돌처럼 보이는 섬유 오브제를 만들다 보면, 왜 사람들은 돌을 만지면 안정되는지 자꾸 생각하거든요. 돌은 말이 없고, 급하지 않고,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잖아요. 내가 엉망인 날에도 돌은 그냥 돌이에요. 그 태도가 부럽죠. 그래서 새해 소원을 ‘돌탑의 첫 번째 돌’에 적는다고 상상해요. 기단이 되는 첫 돌. 첫 돌이 삐뚤면 위에 아무리 예쁜 돌을 얹어도 결국 흔들리잖아요. 그러니까 새해의 소원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기단’입니다. 올해의 방향, 내 마음이 돌아올 기준점.
그럼 첫 돌에는 뭘 적어야 하냐. 여기서 인간의 욕심이 나오죠. “행복하게 살기”, “건강하기”, “사랑받기”. 다 좋은데, 저는 요즘 이런 문장은 너무 커서 손에서 미끄러진다고 느껴요. 너무 큰 돌은 손으로 잡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한 문장을 더 구체적으로 바꿉니다. “나는 올해 내 속도를 잃지 않는다.” “나는 올해 나를 닦는 일을 미루지 않는다.” 평화가 뭔지 물으면 답이 백 개 나오는데, ‘내 속도’는 그나마 잡힙니다. 그리고 속도를 잃지 않는다는 건 남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요즘 세상에서 이거 하나만 지켜도 거의 수행자입니다.
소원을 문장으로 적는 순간, 생각이 연기에서 물건이 됩니다.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는 흩어지는데 글로 쓰면 실체가 생겨요. 저는 그래서 소원을 꼭 적어요. 종이에 적든, 메모 앱에 적든. 가능하면 손으로요. 손으로 쓰면 내 몸이 그 문장을 한 번 통과시키는 느낌이 들어서요. 불안이 많은 날일수록 사소한 의식이 나를 붙잡아주거든요.
근데 여기서 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의 기분을 과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거만 되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되면 행복이 생각보다 빨리 평상시로 돌아오기도 하죠.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미래 사건이 자신의 감정에 미칠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많이 보인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소원을 결과로만 붙잡으면, 결과가 와도 금방 다음 결핍을 찾는 뇌와 만나서 허무해질 수 있어요.
뇌는 보상에 반응하는 방식이 좀 짓궂습니다. 흔히 도파민을 “쾌락 물질”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예측’과 ‘예상과 현실의 차이’에 크게 반응한다는 설명이 유력하죠. 예상보다 좋은 일이 오면 신호가 확 올라가고, 기대했는데 안 오면 뚝 떨어지고. 그래서 예정된 행복에는 빨리 무뎌지고, 뜻밖의 칭찬에는 더 흔들리기도 해요. 새해 소원도 비슷합니다. “올해는 뭔가 바뀔 거야”라는 예측이 생기면 잠깐 흥분하는데, 그 흥분은 금방 사라져요. 그러니까 필요한 건 흥분을 오래 끌 기술이 아니라, 조용히 반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돌을 하나씩 올리는 구조.
그래서 저는 돌탑을 이렇게 씁니다. 소원은 첫 돌, 그다음은 ‘작은 계획’이에요. 아주 작게.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 어떻게”를 정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상황이 오면, 나는 이런 행동을 한다” 같은 식으로요. 이런 if-then 계획이 행동을 실제로 시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연구들이 많고, 꽤 큰 효과를 보고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아침에 물을 끓이면, 그 시간에 창문을 열고 30초만 숨을 쉰다.” “작업실 의자에 앉으면, 먼저 5분 동안 재료를 정리한다.” 이런 식으로요. 거창한 결심 대신 상황과 행동을 묶어두는 거죠.
그리고 저는 이 계획을 만들 때 ‘방해물’을 같이 적습니다. 새해에는 희망이 과잉 공급되기 때문에 장애물이 잘 안 보여요. 근데 현실은 늘 장애물과 같이 오죠.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다”를 적었다면 “그 평화를 깨는 건 대개 무엇이냐”도 같이 보는 겁니다. 저는 대개 조급함이더라고요. 남들 속도 보고, 비교하고, “나만 뒤처지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자동 재생하는 것. 그게 내 평화를 계속 깨요. 그러면 계획은 단순해집니다. 비교가 올라오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예를 들면 폰을 내려놓고 손을 씻는다. 물소리를 듣는다. 심호흡을 1분간 한다. 이런 것도 돌 하나의 역할을 합니다. 아주 작지만 균형을 잡아줍니다.
여기서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카뮈의 <시지프 신화>요. 시지프가 돌을 산 위로 굴리는데, 꼭대기 가면 떨어지고, 또 굴리고, 또 떨어지고. 듣고 있으면 “이게 무슨 벌이야” 싶잖아요. 근데 카뮈는 거기서 이상한 결론을 냅니다.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저도 예전엔 “그건 너무 정신승리 아닌가요” 싶었는데,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돌을 굴리는 일이 의미 없어서 괴로운 게 아니라, 그 돌이 ‘내 돌’이 아니라고 느낄 때 괴로운 거예요. 반대로 “그래, 이건 내 돌이다”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반복이 단단해집니다. 돌탑도 그래요. 남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오늘 올렸다는 사실이 나를 바꿔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사건이 휘몰아치지도 않고, 인생을 뒤집는 큰 반전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오래 남아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노래를 듣는 루틴이 반복되잖아요. 근데 그 반복이 ‘지루함’이 아니라 ‘정성’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어요. 결국 바뀌는 건 하루의 구성표가 아니라, 그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이더라고요. 저는 새해 소원도 딱 그 지점과 닮았다고 느꼈어요. 소원이 대단한 사건을 부르는 주문이 아니라, 내가 같은 하루를 대하는 각도를 바꾸는 문장일 수 있다는 것. 각도가 바뀌면, 하루가 돌 하나가 됩니다. 커다란 성공담은 없어도 “그래도 오늘을 살았다” 같은 날들이 쌓이고요.
그래서 저는 새해 소원을 이렇게 다시 말해보고 싶어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소원은 완성이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결과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방향을 잃을 때 무너져요. 방향이 있으면 좀 헤매도 괜찮거든요. 산길에서 길을 잃어도 기준점이 있으면 돌아오잖아요. 새해 소원은 그런 기준점 같은 문장입니다.
혹시 지금 글을 읽으면서 “그럼 내 소원은 뭘까” 싶으신 분 있죠. 괜찮아요. 바로 안 나와도 됩니다. 소원은 생각보다 수줍어요. 특히 어른이 되면 더 그래요. 욕망을 말하면 욕심 사나워 보일까 봐, 혹은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자존감이 낮은 사람처럼 비쳐질까 봐, 스스로 검열을 하잖아요. 근데 새해는 그 검열을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에요. 욕망을 허락받는 시간. 오늘 밤에 아주 조용히 한 문장만 써보세요. “나는 올해 무엇을 잃지 않고 싶나.” “나는 올해 무엇을 회복하고 싶나.” 너무 큰 문장이라면 손에 잡히는 단어로 바꿔보는 거예요. 속도, 호흡, 수면, 관계, 몸, 작업, 고요. 이런 단어들. 그리고 그 문장을 가능하면 아주 작은 행동 하나와 묶어두기. 돌은 그냥 올리는 게 아니라, 올릴 자리를 미리 만들어야 하거든요.
저는 올해 첫 돌에 이렇게 적어두려고요. “나는 올해 차곡차곡 쌓는다.” 시간을요. 하루를요. 작업을요. 마음을요. 멋있게 말해서 그렇지, 그냥 저는 축적형 인간입니다. 폭발형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근데 느리게 쌓인 건 잘 안 무너져요. 저는 그걸 믿고 싶습니다.
아까 제가 소원 빌 때 “돈도요” 이런 말을 붙이게 된다고 얘기했죠. 그 말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잖아요. 올해는 그 뒤에 한 문장을 더 붙여보려고요.
“돈도요, 그리고 내가 나를 잃지 않게 해주세요.”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하루에 돌 하나씩만.
오늘은 첫 돌을 고르는 날이니까요. 닫지 마시고 잠깐만요. 지금 이 글 다 읽고 나면 메모 앱 열고 한 문장 적어놓고 닫아요. 안 그러면 우리 인간은 또 내일로 미룹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훨씬 게으르거든요. 아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돌 하나를 쌓아 올려요.
지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