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한때는 ‘좋은 관계 매뉴얼’을 혼자 써서 혼자 지키고 살았어요. “진짜 친한 사이는 하루에 한 번 연락해야 한다.” “연애하면 하루에 한 번 이상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친한 친구라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1번으로 떠올라야 한다.” 지금 몇 가지 쓰면서도 벌써 피곤해져요. 이 매뉴얼의 문제는, 상대가 같은 매뉴얼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나는 열심히 기준을 지키고 있는데, 상대는 그냥 자기 리듬대로 살고 있어요. 그러면 답장이 평소보다 조금만 늦어도 내 머릿속이 바로 회의실이 돼요. 5분이 지나면 “무슨 일 있나?”로 시작해서 10분이 지나면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로 넘어가고, 31분이 지났어요. 그럼, 이제 “헤어질 결심”을 하게 돼요. 나 혼자 드라마를 찍는 중인 거죠. 배우도 나, 감독도 나, 시청자도 나. 근데 이제 보는 사람은 없는.
재밌는 건, 이런 과몰입이 내 의지가 약해서만은 아니래요. 사람에게는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기본 동기라고 하는데요, 거기서 말하는 핵심이 이거예요. “빈번하고, 불쾌하지 않은 상호작용”이 “지속되는 관계” 안에서 반복돼야 우리가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관계가 끊길 것 같은 신호가 오면 머리와 마음이 과민해지는 게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거죠.
여기서 문제는 뭐냐. 자연스러운 반응 위에 내 ‘상상’이 과하게 덧칠된다는 거예요. 답장이 늦은 건 그냥 회의 중일 수도 있고, 샤워 중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 빈칸을 “나한테 마음이 식었나?”로 채워버리죠. 그리고 인간은 원래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크게 반응하는, 부정 편향이 있다고 하죠. 나쁜 사건이 좋은 사건보다 영향력이 크고, 더 오래 남고, 처리되어 남는다는 것. 그러니까 열 번 다정하다가 한 번 툭 쏘면, 그 한 번이 계속 머리에 맴도는 거예요. 내 인간관계가 ‘좋은 말 10개’로 안전하게 저장되면 좋은데 ‘상처되는 말 1개’가 대표격이 되어버릴 수 있는 거죠.
반대로 나는 어떤 관계에서는 너무 느슨했어요. “우린 말 안 해도 알지” 같은 말로 서로를 덮어두고, 실제로는 최신 근황을 잘 모르는 사이. 만나면 반갑긴 한데 대화는 늘 옛날 얘기밖에 할 게 없는 거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괜히 허전해요. 사진으로는 여전히 “오랜 절친”인데, 실제로는 알맹이가 조금씩 빠져나간 것 같더라고요. 오래 입어서 탄성 다 빠진 스웨터 같은 사이. 입을 순 있는데 따뜻하진 않은 그런 옷이 되어버린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친밀함은 타이트함도 느슨함도 아닌,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한 지점에 대한 합의’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합의는 거창한 서약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조율이에요. 템포, 말투, 연락 빈도, 침묵의 길이, 농담의 강도, 서운함을 꺼내는 방식. 이런 것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거죠.
이걸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건, 아까 말했던 그 애매한 친구 관계에서였어요. 정리하자니 아쉽고, 그대로 두자니 피곤한 사이 있잖아요. 연락하면 반갑고 웃음도 나고 하는데, 통화를 끊고 나면 몸이 축 처지는 사이. 만났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왜 오늘도 이렇게 피곤하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만나면 늘 패턴이 비슷했어요. 내가 내 얘기를 꺼내면 처음엔 잘 들어요. “무슨 일인데?” 근데 조금만 지나면 “근데 나도 요즘 진짜 힘들어”로 흐름이 바뀌고, 그 다음 한 시간은 그 친구 이야기. 저는 그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야, 나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라고 끊기 애매하니까 리스너가 되는 거죠. 그리고 점점 장력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헤어지고 나오는데 마음이 너무 묵직한 거예요. 그날 밤에 메시지를 보냈어요. “나 오늘 너랑 이야기하면서 좀 지치는 느낌이 있었어. 네 얘기를 듣는 건 좋은데, 내 얘기는 중간에 자꾸 사라지는 것 같더라.” 이 말 쓰는데 진짜 오래 걸렸어요. 보냈다가 ‘아 내가 왜 이랬지’ 싶어서 후회가 밀려오던 와중에, 의외의 답장이 왔어요. “야, 나 그런 줄도 몰랐어. 네가 원래 잘 들어줘서 그냥 편하게 말해도 되는 줄 알았지. 다음엔 네 얘기 먼저 물어볼게.” 그 메시지를 읽는데 장력이 확 풀리더라고요. 우리가 거리를 바꾼 건 아니었어요. ‘합의’를 만든 거죠. 그 이후로도 그 친구는 여전히 수다스럽고, 나는 여전히 잘 듣는 사람인데, 대화 중간에 “근데 너는?”이라는 질문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무게 중심이 달라졌어요. 내 손만 계속 쥐고 있던 실이 아니라, 이제는 같이 잡고 있다는 감각이 저를 감싸게 된 거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두고 ‘친구는 또 하나의 자기’라는 표현을 남겼습니다. 멋있죠. 근데 이 말이 멋으로 끝나면 안 되고, 실제로는 이런 뜻처럼 느껴져요. 친구 앞에서 내가 과장하거나 방어하지 않아도, 내 리듬이 깨지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 다시 말해 “장력이 내 몸에 맞는 상태.” 그리고 릴케가 사랑을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하고 인사하는 것’처럼 말한 구절도 있는데, 저는 그 문장이 장력과 상당히 닮았다고 생각해요. 타이트하게 소유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느슨하게 방치하지 않는 것. 내 고독을 지키면서 상대의 고독도 지켜주는 것.
여기까지 오면, “그래 좋다. 근데 그걸 말로 어떻게 합의해? 이미 어색한데” 이런 생각이 들죠. 알아요. 저도 늘 타이밍 놓치다가 나중에 한 번에 터뜨려서 망친 적 많아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할 때는 작정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보자”라고 꺼내는 순간 이미 팽팽한 정도가 100퍼센트를 넘겨버리거든요. 대신 아주 작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요. “나 요즘 답장이 느릴 수 있어. 너 싫어서가 아니라, 하루에 쓸 수 있는 말의 양이 줄었어.” “오늘은 해결책 말고 그냥 들어줘.” “이 이야기는 지금은 무겁게 느껴져서, 내가 정리되면 다시 꺼내고 싶어.” 이 정도의 문장 하나가 장력을 꽤 크게 바꿔요. 거창한 고백보다 허심탄회한 말일수록, 오히려 전달이 잘 되더라고요.
심리학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말할 때, 완전 혼자인 상태가 아니라 ‘누군가가 곁에 있는 상태에서 혼자일 수 있는 경험’이 바탕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이상하죠. 혼자일 수 있으려면 누군가가 필요하다니. 근데 이게 관계 장력하고 똑같아요. 누군가가 옆에 있는데도 내가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관계, 그게 사실 엄청 높은 친밀함이거든요.
뇌과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위협 상황에서 배우자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뇌의 위협 반응이 달라지는 패턴이 관찰된 연구가 있어요. “누군가의 존재, 특히 신뢰하는 사람의 존재”가 내 신경계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친밀함이 좋은 이유는, 감정적으로만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몸의 비용이 줄어드는 측면도 있다는 거예요.
조금 더 크게 보면, 사회적 관계가 스트레스를 완충한다는 ‘버퍼(Buffer)’ 관점도 있고요. 같은 스트레스라도 혼자서 받는 것과, 지지받는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받는 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논의죠.
저는 이런 얘기 들으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있어요. “아, 그래서 내가 사람 만나고 나면 피곤한 날이 있고 덜 피곤한 날이 있구나.”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긴 한데, 아무렇게나 관계를 들이민다고 소화가 되는 게 아니었어요. 내 몸은 ‘어떤 사람’과 ‘어떤 장력’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에너지 비용을 다르게 청구하는 거죠. 이걸 ‘사회적 베이스라인’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하는 연구들도 있는데, 요지는 이래요. 뇌는 원래부터 혼자 모든 걸 감당하는 모드로 설계됐다기보다, 가까운 타인과 부담을 분담하는 상태를 어느 정도 기본값으로 예상한다는 것. 그래서 적절한 관계가 있을 때 오히려 노력이 절약될 수 있다는 얘기예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어요. 친밀함이 무조건 “많이, 자주”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앞에서 말한 ‘소속 욕구’ 논의에서도 ‘빈번한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동시에 그 상호작용이 ‘비-불쾌’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요. 즉, 자주 만나는데 계속 긴장되는 관계면 그건 장력을 조절해야 한다는 신호예요.
그래서 저는 “가까운 관계는 어떻게 나를 치유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요. “어떤 가까운 관계가 나를 회복하게 하는가?” 치유라는 말은 가끔 너무 거창해서 상대가 나를 고쳐줘야 할 것 같잖아요. 실제로는 그냥, 내가 덜 힘쓰게 만들어주는 관계면 충분하더라고요. 내가 덜 설명해도 되고, 덜 해명해도 되고, 덜 방어해도 되는 상태. 그게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내 감정이 덜 굳고, 내 손의 장력도 덜 세지고, 관계는 오래 가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성대한 고백 장면이 나올 때보다, 별말 없이 함께 있는 장면에 더 마음이 가더라고요. 같은 공간에서 각자 자기 일을 하는데 공기가 편안한 장면. 서로가 서로의 리듬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장면. 그게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사랑의 크기가 커서가 아니라 장력의 합의가 잘 돼 있어서인 것 같아요. ‘말이 많은 친밀함’이 아니라 ‘말이 없어도 유지되는 친밀함.’ 그러니까 타이트함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반대로, 겉으로는 되게 다정한데 계속 눈치를 보는 관계도 있죠. “오늘 기분 안 좋아?” “내가 뭘 잘못했어?” “화났어?” 이런 말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관계. 이건 거리가 가까워도 장력이 계속 과부하인 상태예요. 누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합의가 없어서. 서로의 디폴트 값이 달라서. 한쪽은 촘촘함을 사랑으로 느끼고, 다른 쪽은 숨 쉴 틈을 사랑으로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차이를 ‘성격 차이’라고만 덮으면 계속 삐걱거려요. 합의가 필요해요.
연애에서 초반의 장력이 높아도 버티는 이유는 설렘이라는 마취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 마취가 풀리고, 그때부터는 작은 부정적 신호 하나가 크게 느껴져요. 인간이 원래 부정적인 신호에 더 민감하다는 얘기를 떠올리면, “왜 별것도 아닌데 서운하지?” 이런 생각이 설명됩니다. 한 번 툭 던진 말이 한동안 마음에 걸리는 것도요.
작은 부정의 데미지를 상쇄시키려면, 평소에 ‘긍정의 잔고’를 쌓아두는 게 중요해요. 갈등 상황에서 부정적 상호작용 하나당 긍정적 상호작용이 여러 번 필요할 수 있거든요. 물론 그걸 숫자로만 외우면 또 매뉴얼이 돼서 피곤해지는데, 감각적으로는 이런 거예요. 서운한 말을 했으면, 그다음엔 관계를 다시 부드럽게 만드는 작은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가족이라는 이유로 너무 당연하게 타이트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너니까 이 정도 말은 해도 돼.” “가족이니까 참아.” 이게 장력을 계속 조이죠. 저는 부모님이랑 통화할 때, 정말 사소한 한마디가 장력을 확 올릴 때가 있어요. “요즘 일은 어때?” 다음에 따라오는 “어떻게 좀 할 만해?” 같은 말. 걱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건 아는데, 그 말이 내 몸을 굳게 만들면 그게 신호예요. 그래서 요즘은 가족에게도 아주 작은 합의를 시도해요. “그런 반복된 질문은 나한테 압박으로 들려.” “일 이야기는 내가 먼저 꺼낼게.” “지금은 근황만 나누고 싶어.” 가족은 오히려 ‘말 안 해도 알겠지’라는 착각 때문에 합의가 더 필요하더라고요.
친구 관계에서는 또 다른 함정이 있어요. 친해질수록 “서로 맞춰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고, 그 의무감이 장력을 조여요. 저는 요즘 이런 질문을 자주 해요. “지금 이 관계에서 나는 어느 방향으로 더 당기고 있지?” 내가 계속 맞춰주느라 장력이 한쪽으로 쏠리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편해져서 상대가 힘을 쓰고 있는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친밀함이 결국 ‘나만 편한 상태’가 아니라 ‘서로 편한 상태’여야 오래 가기 때문이에요. 합의된 친밀함이라는 말에는 윤리 같은 게 들어 있어요. 서로의 편안함을 동시에 고려하겠다는 약속 같은 것이죠.
이 얘기를 하면서 저는 “좋은 관계”를 새로 정의하게 됐어요. 좋은 관계는 내 인생을 해결해주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덜 힘들게 살 수 있도록 내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관계. 그 관계의 조건은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장력의 조율 가능성이에요. 내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그건 어떤 느낌이야?”라고 물어봐주는 태도. 내가 “오늘은 말하기 싫어”라고 했을 때 “그래, 오늘은 말하지 마”라고 받아주는 태도. 내 고독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내 외로움을 버려두지 않는 태도. 그게 바로 타이트함도 느슨함도 아닌,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한 장력의 지점이더라고요.
여기까지 읽고 계시죠? 중간에 멍 때렸어도 괜찮아요. 이런 얘기는 지금 당장 딱 이해되기보다, 일상에서 갑자기 떠오를 때 힘을 발휘하거든요. 누군가의 답장이 늦을 때, 갑자기 서운함이 올라올 때, 통화 후에 몸이 굳어 있을 때,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유 없이 피곤할 때. 그 순간에 한 번만 떠올려봐요. “우리 사이 장력, 지금 너무 조였나? 너무 풀렸나? 아니면 합의가 부족했나?”
오늘만큼은 조금 더 내가 편한 쪽으로 장력을 살살 조절해둬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내일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문장 하나라도 건네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난 요즘 이 정도 템포가 편해.”
그 한마디가, 관계의 모양을 지속하게 만드는
첫 코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부디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편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랍니다.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