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상하게 겨울만 되면 삶을 정산하고 싶은 모드가 켜지거든요. “올해 뭐 했지? 뭘 이뤘지? 이게 최선이었나?” 갑자기 스스로에 대한 감사가 들어가요. 마치 국세청이 장부를 들고 와서는 “이 지출은 뭐죠?” 묻는 느낌. 예전에는 이게 그냥 성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겨울마다 스스로를 후려치는 연례행사였더라고요. 특히 회사 다니던 때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연말에 항상 평가 시즌, 마감, 행사, 이것저것 다 겹치고. 그때는 연말에 방송 이벤트, 행사 포스터, 시상식 이런 것들이 몰려 있었거든요. 감리 보고 을지로 골목에서 나오면 트리 반짝거리고 캐럴 나오는데, 제 눈에는 “간판 저거 자간 안 맞는다, 사이즈 너무 큰데?”라는 직업병과 “올해도 내 삶의 방향은 불분명하다”라는 실존적 고민이 동시에 재생되는 거죠. 겉으로는 화려한데, 속은 계속 쓸쓸한.
나중에 뇌과학, 정신의학 관련 서적들을 보면서 알게 된 건데, 이게 어느 정도는 ‘정상 반응’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날이 짧아지고 햇빛이 줄어들면, 우리 몸 안의 생체시계가 실제로 좀 꼬인대요. 낮과 밤을 구분해주는 리듬이 흐트러지고, 그게 수면이랑 기분에도 영향을 줍니다. 햇빛이 부족하면 기분과 관련 있는 세로토닌은 줄어들고, 대신 잠을 부르는 멜라토닌 분비는 길어지고, 이게 계속 반복되면 계절성 우울까지 가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겨울만 되면 우울감이 심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겨울엔 유난히 의욕이 떨어진다”는 걸 느끼죠. 뇌과학자 브루스 맥유언이 이런 걸 두고 ‘올로스타틱 부하(Allostatic load)’라는 말을 썼어요. 쉽게 말하면 “스트레스와 적응을 하느라 몸과 마음에 쌓이는 마모” 같은 거예요. 계속 긴장하고, 계속 대비하고, 계속 버티다 보면, 시스템이 어느 순간부터는 ‘저전력 모드’로 들어가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겨울에 기운이 빠지는 게 꼭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는, 뇌랑 몸이 실제로 “에너지 절약 모드”로 들어가고 있는 거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럴 때 필요한 게 ‘마음의 월동 준비’라고 생각해요. 몸에 전기장판 까는 것처럼, 마음에도 전기장판을 하나 깔아주는 것. 창틀에 문풍지 붙이는 것처럼, 마음에도 문풍지를 붙여주는 것.
겨울 이야기를 하면, 저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이 시골 집 부엌에 혼자 서 있는 장면이 떠올라요. 집 밖으로는 논밭이 다 얼어 있고, 마당에 살짝 쌓인 눈이 숨만 쉬어도 바스락 소리를 낼 것처럼 고요하잖아요. 바람은 차갑고 세상은 멈춘 것 같은데, 집 안 부엌에서는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프라이팬에서는 지글지글 소리가 나고, 도마 위에서 채소 써는 소리만 조용히 이어지죠. 작은 형광등 불빛 아래, 혜원이 혼자 이것저것 꺼내서 끓이고 굽고 데우면서, 말수는 적지만 묵묵하게 자기 하루를 버티는 그 공기. 저는 그게 사람 마음이 겨울을 나는 기본 세팅 같다고 느꼈어요. 바깥세상은 계속 차갑고 시끄럽고 할 일은 쌓여 있지만, 내 안에는 저 시골 집 부엌 같은 공간 하나는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거죠.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아무도 못 알아줘도 상관없는, 최소한 나만큼은 나를 위해 밥 한 끼 차려줄 수 있는 조그만 부엌 하나. 마음 한구석에 그런 노란 불 켜진 부엌이 있어서, 바깥이 아무리 폭설이어도 잠깐 들어가 몸 좀 녹이고 다시 나갈 수 있는 상태. 저는 그걸 마음속에 따로 마련해 두는 나만의 ‘월동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마음은 겨울이 되면 얼음판 같은 데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작은 말 한마디에도 더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유난히 서운해지고, 답장이 늦게 오면 “아,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나 보다” 이런 생각까지 단숨에 가버리고.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부정성 편향’이 여기서 힘을 아주 잘 씁니다. 뇌는 원래 부정적인 정보를 더 강하게 기억하고 빨리 포착하도록 설계돼 있어요. 생존을 위해서. 긍정적인 건 좀 놓쳐도 되지만, 위험 신호를 놓치면 바로 죽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겨울같이 에너지가 떨어지는 시즌에는 “나 오늘 좀 예민하구나” 정도로만 넘어갈 일을 “나만 신경 쓰지” 이런 식으로 확대 해석하기 딱 좋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적 많았거든요. 친구가 “요즘 좀 바빠서, 우리 만남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다”고 했을 때, 머리로는 ‘일이 많겠지’ 알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내 얘기가 너무 무거웠나, 같이 있으면 피곤한가 보다” 이런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거예요. 그게 다 얼음판 위라서 그래요. 작은 충격에도 쩍, 금이 쉽게 가는 상태.
그럴 때 제가 좀 도움이 됐던 건, 마음 안의 날씨를 그냥 말로 “불러주는” 거였어요. 리버만의 실험 기억하세요?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사람들에게 불안해지는 사진을 보여주고 한 그룹은 그냥 보게 하고, 다른 그룹은 “지금 나는 긴장된다”처럼 감정을 말로 표현하게 했거든요. 그랬더니 감정을 말로 이름 붙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공포를 담당하는 편도체 활동이 줄어들고, 이성적인 판단과 관련 있는 전전두엽 활동이 올라갔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나 지금 좀 불안해”, “나 오늘 유난히 예민하다” 이렇게 한 번 입 밖으로 꺼내주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에 통째로 휩쓸리지 않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저는 요즘 겨울에는 스스로한테 자주 중얼거려요. “아, 나 지금 괜히 초조한가 보다.” “나 오늘은 사회성 배터리가 10퍼센트구나.” “이건 외로움이다. 사람이 부족해서 그렇다.” 되게 사소해 보이는데, 실제로 해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덜 꽉 막힌 느낌이 듭니다. 꽉 조여 있던 셔츠의 단추 하나를 살짝 푸는 정도. 세상은 똑같은데, 숨이 약간 더 들어오는 느낌.
겨울이 되면 또 하나 크게 작동하는 감정이 있죠. ‘비교’. 연말이 되면 각종 플랫폼에서 올해의 리뷰를 해주잖아요. 스트리밍 서비스가 “당신이 가장 많이 들은 곡 TOP 5는…” 알려주고, 인스타같은 데에는 사람들이 “올해의 나” 사진 모음 올리고. 누군가는 연말에 프로포즈를 하고, 누군가는 크리스마스 여행을 가고, 누군가는 가족과 행복한 식탁 사진을 올리는데, 나는 오늘도 야근이고, 편의점 김밥에 컵라면, 이런 거죠. 이쯤 되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실험실 CCTV에 찍힌 “성인 남성, 겨울철 행동 관찰 중” 이런 피사체가 된 기분이 듭니다. “이 피사체는 1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이럴 때 올해 본 콘텐츠 중에서 <폭싹 속았수다(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를 다시금 떠올리게 돼요. 화려한 성공담이라기보다, 여러 번 무너지고 부숴지면서도 살아가는 이야기잖아요. 거기서 인물들이 겪는 건 정말 말 그대로 “인생이 나한테 던지는 시트콤도 아니고 비극도 아닌, 애매하게 지치게 하는 사건들”에 가깝잖아요. 그래도 버티게 해주는 건, 엄마가 끓여주는 국 한 그릇, 비바람 부는 날에도 같이 일하고 같이 쉬어주는 사람들, “수고했다”는 한마디 이런 것들이에요. 감독이 “시큼한 귤을 따뜻한 귤차로 끓여 마시는 이야기”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그게 마음의 월동 준비에 딱 맞는 비유 같더라고요. 현실이 자꾸 시큼해져도, 그걸 그대로 들이키지 않고, 일단 따뜻하게 끓여보는 것. 같이 마실 사람까지 있으면 더 좋고요.
우리도 사실 비슷하죠. 겨울에 버티게 해주는 건 거대한 각성이 아니라, 되게 작은 장면들인 것 같아요. 집에 갔는데 엄마가 “배고프지?” 하면서 국 먼저 내오는 순간이라든지, 친구가 “야, 나 지나가다 너 생각나서” 하고 귤 한 봉지 들고 오는 거라든지. 내 인생 성적표를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라, “오늘도 수고했다” 한마디 해주는 시선.
실제로 사회적 지지가 감정 조절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연구도 있어요. 버지니아대의 코언이라는 연구자가 fMRI 안에 사람들을 눕혀놓고 “이제 전기 충격이 올 수도 있다”는 불안한 상황을 만들고, 혼자 있을 때, 낯선 사람 손을 잡았을 때, 배우자 손을 잡았을 때를 비교했거든요. 배우자 손을 잡은 조건에서 편도체나 시상하부 같은 위협 반응 관련 뇌 영역의 활동이 확 줄어들었어요. 그러니까 겨울에 친구에게 “야, 나 요즘 좀 힘들다”라고 말하면서 메시지창만 같이 보고 있어도, 그게 이미 뇌 입장에서는 난방이 켜진 상태라는 거죠.
이제 좀 더 실실적인 월동 준비 이야기를 해볼게요. 저는 요즘 ‘마음 월동 준비 세트’를 세 가지로 나눠서 생각하고 있어요. 몸, 감정, 그리고 일상 구조. 먼저 몸. 아까 몸은 월동 준비 잘한다고 말해놓고 또 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사실 마음이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절반 이상은 몸 상태에서 오기 때문이에요. 최근 연구들을 보면, 아침에 일정량 이상 빛을 쬐는 것만으로도 수면과 기분이 좋아지고 계절성 우울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거든요. 겨울에 햇빛이 부족하면 세로토닌이 줄고, 그게 다시 멜라토닌 분비 타이밍을 바꾸면서 수면–각성 리듬을 깨뜨리기 쉽다고도 하고요.
그래서 제 겨울 루틴 1번은, 거창하게 말하면 “햇빛에 출근시키기”예요. 현실적인 버전은 이 정도입니다. 기상 후 1시간 안에 커튼을 확 열고 최소 5분 이상 창밖을 멍하니 보기. 주말엔 가능하면 오전에 잠깐이라도 걸어 나가기, 편의점까지라도. 도저히 밖에 나가기 싫은 날에는 창가 쪽 자리를 고집하며 카페에서 뜨거운 음료를 마시기.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나는 이제 빛과 함께 사는 남자다” 선언했는데요, 결과는 3일 만에 실패. 그다음부터는 기준을 낮췄어요. “일주일에 두 번만 지켜도, 이번 겨울은 선방이다.” 겨울 월동 준비의 첫 번째 원칙은 이거인 것 같아요. 겨울에는 목표치를 여름보다 한 단계 낮춰도 된다.
두 번째는 감정. 저는 요즘 이걸 ‘마음 기상청’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하루에 한 번쯤은 나한테 이렇게 물어보는 거죠. “지금 내 마음 날씨는 맑음, 흐림, 소나기, 폭설 중 뭐지?” 만약 폭설이면 그 폭설의 이름을 붙여줘요. 서운함, 불안, 피로, 질투, 공허함. 그리고 이렇게 적어보는 거예요. “오늘 기분: 공허 + 피곤 + 약간의 허무. 원인: 아직 모름. 해결책은 나중에.” 당장 고치려고 들지 않고, 일단 기록만 해두는 거죠. 리버만 연구처럼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편도체 반응은 줄고 전전두엽 활동은 올라간다고 했잖아요. “나 지금 왜 이래”보다 “아, 내가 지금 이렇구나”에 가까운 문장이 되면 그게 단열재 역할을 합니다. 감정이 그대로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한 번 단어라는 옷을 입고 들어오는 거니까.
한 번은 이런 날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유 없이 마음이 너무 텅 빈 거예요. “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무기력인가 보다” 싶은 어느 날. 예전 같으면 바로 ‘왜지? 내가 뭘 잘못했지? 뭘 더 해야 하지?’ 이런 식으로 분석 모드로 들어갔을 텐데, 그날은 그냥 노트에 이렇게 썼어요. “오늘 마음: 허공에 매달린 느낌. 할 말은 없는데, 누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페이지를 북마크해 놓고 그냥 하루를 지냈어요. 신기하게도 저녁쯤 되니까 이유가 조금 보이더라고요. 며칠 동안 사람을 거의 안 만났더라고요. 관계의 난방을 꺼둔 채로 버티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날 폰을 들고, 오래 연락 안 했던 친구에게 짧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야, 갑자기 네 생각나서. 잘 살지?” 답장은 예상대로 한참 있다가 왔어요. 그래도 그 한 줄을 보내는 순간, 내 안에 온도가 1도쯤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일상 구조. 겨울에 저는 ‘할 일 리스트’를 아예 시즌 한정 메뉴처럼 다시 짭니다. 여름 버전 리스트는 되게 멋있어요. “아침 7시 기상, 러닝 5km, 작업 4시간, 독서 1시간, 명상 20분…” 듣기만 해도 이미 인생 잘 사는 사람 느낌이 나죠. 근데 겨울에는 이게 거의 자기 학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겨울 버전 루틴은 이 정도로 줄였어요. 아침에는 커튼 열기, 물 한 컵 마시기, 오늘 꼭 해야 할 일 1개만 적기. 낮에는 그 1개를 어떻게든 끝내기(퀄리티는 나중에 고민). 저녁에는 폰 내려놓고 멍 때리는 시간 10분.
뇌과학에서 말하는 올로스타틱 부하가 결국 “계속 대응해야 하는 상태” 때문에 쌓인다고 하거든요. 알림, 메시지, 소식, 뉴스… 뭐든 반응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으면 시스템이 과열돼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아무 데도 대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저는 그걸 보통 뜨개나 섬유 작업으로 채우는 편이고요. 손은 뭔가를 하고 있지만, 머리는 잠깐 비워지는 그 상태. 몸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마음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기분.
문학에서도 겨울은 늘 중요한 배경이죠. 누가 봐도 위기인 계절. 근데 요즘은 저는 오히려 <폭싹 속았수다> 같은 작품이 현대판 겨울 소설 같다고 느껴져요. 자연재해, 가난, 가족사, 시대의 폭력 같은 것들이 계속 몰아치는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밥을 짓고, 귤을 까고, 빨래를 널고, 서로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보거든요. “열 있나?” 이게 사실 최고의 정신건강 체크잖아요. 그걸 보면서, 아 겨울을 나는 건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이런 몸짓들에 가깝겠구나 싶었어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도 아마 이런 마음들이 있을 거예요. “나 사실 올해 너무 힘들었다. 근데 그걸 누군가에게 길게 설명하기도 벅차다.” 혹은 “사람들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좀 고장 난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일단 이렇게만 말해볼까요. “올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사실 꽤 잘 버틴 거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두고 자주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진행 중인 존재’라는 거잖아요. 스피노자가 인간을 “자기 힘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존재”라고 봤고, 또 다른 철학자들은 계속되는 선택과 책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도 했고. 겨울 버전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뜨겁게 타오르는 존재가 아니라, 때때로 꺼질 것 같은 불씨를 어떻게든 지키는 존재다.”
그러니까 이 겨울에는, 불씨만 지켜도 됩니다. 거대한 캠프파이어는 나중에 해도 돼요. 지금은 바람을 조금 막아주고, 장작을 조금씩 보태주고, 완전히 꺼지지 않게만 관리하면 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별일 아닌 것 같아도, 그게 거의 전부일 때가 많아요. 몸에는 햇빛과 수면이라는 난방을, 마음에는 감정 이름 붙이기와 여유라는 단열재를, 일상에는 낮아진 목표치와 느슨한 루틴이라는 문풍지를, 그리고 그 위에 얹는 사람 한두 명의 체온을. 이 정도만 갖추면, 올겨울도 어떻게든 지나갈 겁니다. 완벽하게 멋있게 지나가진 않더라도, 최소한 얼어붙지 않은 상태로.
오늘 하나만 골라볼까요?
내일 아침 커튼을 조금 더 일찍 여는 것.
오늘 밤 감정 이름을 하나 적어보는 것.
이번 주 안에 “야, 잘 지내?” 하고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에게 메시지 한 줄 보내는 것.
그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걸리세요? 그게 아마 지금 당신 마음이 가장 필요로 하는 월동 준비일지도 몰라요.
오늘도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마워요.
밖에 나가야 한다면 목도리 꼭 하고, 집에 있다면 이불을 아예 들고 다니는 삶을 강력 추천합니다. 우리, 올해 겨울은 “성장보다 생존, 성과보다 체온”이라는 슬로건으로 가봅시다.
그럼, 다음 뉴스레터에서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