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루틴은 어떠세요? 저는 한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서 10분 정도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스트레칭을 하고 세수를 하고 거울에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하루를 열고, 작업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낮에 충분히 몰입하면 밤에 유튜브 좀 봐도 덜 죄스럽더라고요.
저는 요즘 <신인감독 김연경>에 빠져서 <하이큐!!>도 보게 되고 배구 하이라이트도 챙겨보고, 게임 대회도 봅니다. 그러다 보니 팬심이 자라다 못해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배구공을 샀습니다. 배구 기초, 리시브 자세 같은 영상도 찾아보고 혼자 벽에 공을 때려서 받아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동호회까지 알아보게 됐어요. 아직은 그 정도 용기는 안 나서 다음 주 주말쯤 한 번 가볼까 하고 있어요. 이런 소소한 흥미가 불안의 틈새를 조금 메워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이 완벽해서 편한 게 아니라, 이런 조각들이 붙어서 ‘아, 오늘도 나름 살만하네’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죠.
불안은 밀어낼수록 더 끈질기게 옆에 딱 달라붙는 것 같아요. 모른 척하면 소파 밑에 쌓이는 먼지처럼 어느새 가득 모여요. 한 번은 우울감에 제대로 빠져본 적이 있어요. 그때 주변 사람들 배려가 너무 고마운데, 어느 순간 ‘계속 이런 부정적인 태도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만 하는 내가 너무 뵈기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이 오히려 전환점이 됐어요. 더 숨지 말자, 그냥 마주 보자. 그래서 제가 택한 방식은 이겁니다. 도망치지 않고, 최대한 그 감정을 느껴버리기. 티는 덜 내고, 속으로는 흠뻑. 그렇게 바닥을 치고 나면, 어느 날 나가버렸던 퓨즈가 다시 들어온 느낌이 와요. 설거지를 하다 말고, 갑자기 ‘아, 괜찮다’ 하는 찰나. 그 찰나를 기다리려면, 먼저 좀 바닥을 쳐야, 내려가야 하더라고요.
우리는 늘 ‘불안’을 달고 사는 존재나 마찬가지예요.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 그래. 라고만 하기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잖아요. 그러면 정상적인 불안과 병적인 불안은 뭐가 다를까요? 이 경계가 늘 헷갈립니다. 누구나 긴장하고, 누구나 걱정하죠. 그럼에도 선이 있어요. 하루의 절반 이상을 걱정에 쓰는지, 그 걱정 때문에 일이나 관계가 눈에 띄게 무너지는지, 불안을 막으려고 술이나 진정제에 자꾸 손이 가는지. 이런 지점이 반복되면, “이건 내 성격”이 아니라 “이건 내 몸과 마음의 패턴”이라고 보는 게 맞아요. 예를 들어 ‘걱정의 주제가 늘 바뀌는데, 강도는 항상 세다’면 범불안의 특징에 가깝고, ‘갑자기 아무 데서나 숨이 막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래서 또 그 상황들을 피한다’면 공황과 광장공포가 섞여 있을 수 있어요.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할까 두렵고, 그래서 발표, 회식, 면접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사회불안의 영역일 수 있고요. 중요한 건, 이 셋이 ‘이상한 나’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 두려움의 스펙트럼 위에서 약간 과열된 구간이라는 겁니다. 사람의 키가 그렇듯, 불안도 종 모양의 분포를 보이거든요. 조금 큰 사람, 조금 작은 사람 있듯이요.
공황 발작 얘기를 잠깐 해볼게요. 누군가가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 나 죽을 것 같아”라는 감각을 호소할 때 우리 뇌는 즉시 비상벨을 울립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위협이 있다고 착각했을 때의 정상 반응’이에요. 더 많은 산소를 확보하려고 호흡이 가빠지고, 도망치거나 싸우려고 심장이 가속되고, 피가 팔과 다리로 몰려요. 그래서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이 떨리죠. 견딜 수 없이 불쾌하지만, 그 반응 자체는 위험하지 않아요. 오히려 산소와 혈류를 돌리는 생존 시스템이 과민하게 켜졌을 뿐. 그래서 그 순간 쓸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어요. “와라.” ‘오지 마’가 아니라 ‘와라’. 경험적으로 알잖아요. 그런 부정적 감정을 억지로 멀리 하려고 할수록 더 오는 거. “와라, 네가 할 수 있는 최악이 뭐냐, 난 여기서 기다린다.” 이런 태도가 과민 회로의 기름을 줄입니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지금 몸이 안전하다는 걸 같이 확인하자, 30분 안에 지나갈 거야” 하고, 숨을 억지로 교정하기보다 발바닥 압력, 손바닥 온도 같은 감각을 천천히 같이 보세요.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위험은 없다, 시간은 지나간다, 몸은 스스로 안정된다” 이 세 줄만 기억해도 급한 불은 잡힙니다.
그럼 치료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서 볼 수 있어요. 스스로의 훈련, 심리치료, 그리고 약물치료. 스스로 훈련할 때의 핵심은 회피를 조금씩 줄이는 노출입니다. 개가 무서우면 목줄을 찬 개와 산책하는 보호자 옆에서 함께 걸어보거나, 지하철이 무서우면 한 정거장만 타보는 거예요. ‘생각’으로 설득하려 들면 실패해요. 몸이 알아야 하니까요. 심리치료는 그 노출을 체계적으로 돕고, 머릿속 재난 시뮬레이션을 재구성합니다. 일주일 걱정 리스트를 만들어 실제로 일어난 일과 대조해 보면, 대부분의 재난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걸 ‘경험의 데이터’로 확인하게 되죠. 공황이라면 발작의 생리적 메커니즘을 함께 해부해 보면서 “심장이 빨리 뛴다고 심장이 고장 난 건 아니다”라는 사실을 몸으로 재학습합니다. 사회불안이라면 그룹에서 ‘작게 민망해지는 연습’을 합니다. 일부러 작은 실수를 시연해 보고 피드백을 받는 식이죠. 생각보다 아무도 나를 그렇게까지 보지 않는다는 걸,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배우도록. 약물치료는 불안의 볼륨 자체를 낮추는 역할을 합니다. 중독 약이 아니고, 보통은 효과가 2주에서 6주 사이에 걸쳐 올라오고 6개월에서 12개월 사용 후 서서히 줄입니다. 심리치료와 병행하면 회복 속도와 재발 방지에 도움 된다고 해요. 이 부분은 꼭 전문의와 상담해 보세요.
관련 강의에서 들은 사례들을 제 생활에 대입해 보니, 경계가 더 선명해졌어요. 어떤 분은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하루 종일 초조해하고, 연락이 20분 늦으면 경찰에 사고 조회를 할 만큼 ‘상상 재난’이 일상을 집어삼켰어요. 또 어떤 분은 쇼핑몰에서 갑자기 심장이 폭주하고 왼팔이 저려 응급실을 두 번이나 갔지만, 검사에선 이상이 없다고 나왔죠. 이후 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까지 피하다 보니 생활 반경이 점점 좁아졌고요. 반대로, 단일한 대상, 예를 들어 벌레나 피처럼, 특정 단일 대상만 피하는 단순 공포는 일상 기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 관리하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요점은 이겁니다. ‘두려움’은 원래 생존 기능이고, 문제는 강도와 지속 시간, 그리고 회피가 삶을 얼마나 갉아먹느냐예요.
‘셀프 체크’는 이렇게 해봅시다. 지난 2주 동안 걱정과 초조 때문에 잠을 뒤척였는지, 긴장을 못 풀어서 근육이 늘 아팠는지, 사소한 일에도 금방 예민해졌는지, 집중이 도망갔는지. 하루의 절반 이상 걱정이 머리를 점령했는지. 세 개 이상 해당되면, 혼자만의 싸움에서 조금 나와도 된다는 신호예요. 저는 요즘 ‘의식적 걱정 시간’을 둬요. 매일 같은 시간 10분. 메모 앱을 켜고 ‘걱정 컨테이너’를 열어놓습니다. 낮에 떠오른 걱정은 일단 거기에 저장만 합니다. 약속한 시간에 꺼내 확인하고, 그중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것만 체크리스트로 옮겨요. 나머지는 “내가 통제 못 함” 박스로 넘기고 접습니다. 이 상자 분류가, 생각의 군집을 흩뜨려요.
공예 얘기도 빼놓을 수 없죠. 제게 뜨개는 ‘현재의 앵커’예요. 불안은 미래의 상상으로 달립니다. 실은 손의 감각으로 붙잡아요. 코를 하나 만들고, 풀고, 다시 만듭니다. 매듭은 실패가 아니라 리듬을 만들죠. 그래서 저는 ‘불안을 줄이는 행동 처방’을 항상 소분합니다. 연락을 미루고 싶은 날엔 두 문장만 보내기. 전시가 막막한 날엔 목업 1개만 만들기. 낯선 자리에서 손이 떨리면, 물컵을 쥔 손목의 온도를 10초 세기. 작아 보이지만, 회피의 고리를 끊는 첫 칸입니다.
공황을 겪는 친구를 도울 때 기억할 세 문장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위험은 없다, 시간은 지나간다, 몸은 스스로 안정된다.” 그리고 옆에서 해줄 실전 팁 몇 가지. 의자 등에 등을 대고 앉게 하고, 발바닥이 바닥을 누르는 느낌을 묻습니다. “발가락 10개를 차례로 눌러 볼래?” 같은 지시가 좋아요. 심박을 재거나 구급을 부를지 고민되면, 이미 여러 차례 검사에서 이상이 없었다는 정보를 떠올리게 돕고, ‘다시 온다’는 두려움보다는 ‘와도 견뎠다’는 기억을 상기시켜 주세요. 이게 다음 파도에서의 회복 탄성입니다.
사회불안은 또 달라요. 예의 바르고 조용한 성향과 병적인 불안은 다르죠. 이게 완벽주의와 결합하면 삶을 고문하기 시작해요. “항상 흠잡히지 않게”라는 목표는 사람을 음소거로 만듭니다. 그래서 치료 장면에선 일부러 작게 민망해지는 연습을 해요. 웃긴 옷차림으로 상가를 한 바퀴 돌거나, 조별 발표에서 ‘일부러’ 한 문장을 틀리고 바로 고치는 시나리오를 해보는 식이에요. 생각보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있어도 금방 잊어요. ‘실수=붕괴’라는 등식을 ‘실수=관찰 가능+복구 가능’으로 바꾸면, 사회 장면이 견딜 만해집니다.
불안장애는 가장 흔한 정신건강 문제 축에 들고, 평생에 한 번 이상 겪는 사람이 인구의 유의미한 비율이라고 해요. 특히 30대에서 50대 사이에 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이건 원래 내 성격”이라며 참습니다. 병원 침대에서만 치료되는 병이라고 오해하기도 하고요. 실제로는 대개 외래에서, 주 1회 상담과 필요 시 약물로 충분히 다뤄집니다. 심리치료는 ‘오래 가는 변화’를, 약은 ‘지금 가능한 일상’을 만듭니다. 저는 이 둘을 경쟁이 아니라 팀으로 봐요.
실전 루틴을 더 구체화해볼까요.
첫째, 트래킹 5종: 수면(누적 시간과 기상 일정), 카페인(섭취 시각과 총량), 운동(걷기 포함), 스크린 타임(특히 밤), 몰입 시간(타이머 활용).
일주일만 기록해도 불안 피크와의 상관이 보입니다.
둘째, 미세 노출 캘린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나를 불안하게하는 것들 아주 조금, 하나씩만 해보기.
셋째, ‘와라’ 훈련 카드: 지갑에 작은 카드 하나. 앞면엔 “와라.”, 뒷면엔 “안전-시간-회복.”
넷째, ‘걱정 컨테이너’ 타임: 알람으로 고정해서 매일 같은 시간에 10분만.
다섯째, 사람과의 약속 예약: 주 1회 커피 약속. 불안은 혼자일 때 증식합니다. 메시지나 메일도 좋아요. 지금처럼요.
유행이 지났다고 하기에는 디폴트가 되어버린 것 같은 MBTI 얘기를 덧붙이자면, 다른 것보다도 T와 F 비교가 굉장히 많잖아요. 공감 못 하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싫어서 T가 나왔는데 F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공감은 되는데 말로 풀어내는 게 쑥스러울 뿐인 사람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혹시 주변에서 투박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시면, ‘T야?’ 이러지 말고, ‘방식이 좀 다른가 보구나’ 정도로만 봐주세요. 불안도, 공감도, 각자 방식과 리듬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겐 손이 있습니다. 실이든 스트레스볼이든 뭐든 손에 잡을 만한 것을 가지고 다녀보세요. 손으로 잡으면, 마음이 따라옵니다.
현실적인 목표, 중요하죠. 불안의 볼륨을 낮추는 데 ‘수면’만큼 가성비 좋은 게 없대요. 기상 시간을 고정하고, 오후 늦게 마시는 카페인을 줄이고, 밤에는 폰을 포함해서 스크린 보는 시간의 마지노선을 30분만 당겨도 다음 날의 예민도가 한 칸 내려갑니다. 운동은 거창할 필요 없어요. 10분 정도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교감신경을 ‘건강하게’ 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요. 이건 마음의 소방훈련이에요. 불이 났을 때만 뛰지 말고, 평소에도 연습을 해보자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인류가 살아남게 만든 시스템, 그게 조금 과열된 것뿐이에요. 하지만 이 시스템은 훈련으로 조절이 되고, 필요하면 전문가의 도움으로 훨씬 빨리 안정됩니다. 삶은 실전이에요.
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고, 실 한 타래를 더 엮었고, 이 글을 씁니다.
당신도 당신 방식으로 한 번 엮어보세요.
불안은 큰 파도지만, 매듭은 손끝에서 시작됩니다.
잠깐, 호흡 한 번 함께 해볼까요.
숨 들이마시고, 하나 둘 셋 넷.
숨 내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또 찾아올게요.
잘 지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