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답을 슬쩍 알려줬어요. 콘라트 로렌츠가 ‘베이비 스키마’라고 부른 게 있죠. 둥근 얼굴, 큰 눈, 작고 말랑한 비율이 돌봄 본능을 자극한다는 거예요. 귀여운 대상을 보면 뇌의 보상 회로가 켜지고, 옥시토신 같은 애착 호르몬이 분비돼 가까이 가고 싶고, 챙겨주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올라와요.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귀여움이 우리의 인지 조준을 세밀하게 만든다는 실험들이 있다는 점이에요. 일본의 심리학자 니똣노 히로시 팀은 ‘귀여움’이 주의 집중을 세밀하게 만든다는 실험을 발표했어요. 작고 귀여운 이미지를 본 사람들이 손끝으로 하는 정밀 과제에서 실수를 덜 했다는 거죠. 귀여움이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세 조정 모드로 스위치를 돌린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아, 귀엽다’는 감탄은 미학적 평가를 넘어서 행동을 유도하는 신호예요. 보호하고 싶고, 가까이 가서 확인하고 싶고, 언젠가 돌봐줄 준비를 하게 만들죠. ‘하찮음’은 기능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의 기능을 환기하는 버튼에 가까워요. 그래서 귀여움 앞에서는 마음을 덜컥 놓아도 괜찮아요. 그때 우리는 학습 모드이자 돌봄 모드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요.
생각해보면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쓰는 순간은 대부분 빈틈이 보일 때예요. 완벽한 퍼포먼스, 깔끔한 보고서, 흠잡을 데 없는 성과 앞에서는 경탄하긴 해도 “인간적”이라고 하진 않죠. 오히려 밥풀 하나를 입가에 붙인 채로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 지갑을 놓고 나왔는데 애써 티 안 내고 연기하다 들키는 순간, 카페에서 이름을 틀리게 불러도 웃음으로 넘기는 태도 같은 장면에 ‘인간적’이라는 감각이 올라와요. 문학에서도 그런 장면이 오래 남고요.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도 마찬가지예요. 어딘가 빈틈이 보이고, 애처롭고, 결핍이 있는 대상일 때 마음이 열리죠. 그 하찮음이 등장인물에게 애정을 갖게 되는 중요한 지점이 돼요.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들에게 몰입되는 순간도 비슷해요. 완벽해 보이는 ‘행복이’에게 정작 감정 이입이 되는 때는 완벽했던 초반이 아니라 결핍이 생기면서부터니까요. 픽사의 <업> 역시 거대한 모험이 이야기의 줄기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울리는 건 앨리와 칼이 붙여둔 스크랩북의 사소한 사진들이에요. 비 오는 날 창문에 맺힌 물방울, 집 앞 언덕, 아이스크림 두 스푼의 균형. 큰 클라이맥스가 아닌 작은 반복이 사람을 붙들어요.
여러 가지 재료를 만지며 무늬를 만들고 손끝에서 장력을 조절해 패턴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걸 가르쳐주는 건 실패 직전의 작은 흔들림, 즉 하찮은 오차들이에요. 똑같은 장력으로만 쭉 짜면 천이 매끈하긴 한데 손에 닿는 맛이 없어요. 아주 미세한 울림이 들어가야 생기가 돌아요. 다만 그 울림이 지나치면 꼬이고, 모자라면 무감각해지죠.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너무 긴장하면 뻣뻣해지고, 너무 풀어지면 흐물흐물해지니까요. 하찮음은 그 사이에서 생기는 미세한 떨림이고, 바로 그 떨림이 우리의 촉감을 만든다고 믿어요.
애정하는 사람과의 식사 자리에는 소소한 이벤트가 따라요. 혼자라면 굳이 기다리지 않았을 식당의 웨이팅, 해가 드는 자리에 앉으려고 카페에서 괜히 기웃거리는 시간. 효율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버릇들,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 작은 집착들이 사람의 온도를 만들어요. 귀여움은 외형이 아니라 태도의 결이에요. 조심스럽고 서툴며 자신을 조금 망쳐가면서도 관계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태도죠.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하듯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계산보다 책임이 먼저 깨어난대요. 하찮음은 그 얼굴의 미세한 떨림이에요. 거기서 “나 좀 봐줘”라는 신호가 오고, 우리는 그 신호에 대답하면서 우리도 인간이 돼요.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의 구분을 빌리면, 하찮음은 차가운 연산을 잠시 비켜서 직관을 깨워줘요. 직관은 늘 정확하진 않지만 인간답게 판단하기 위한 연료예요. 특히 관계에서는 더 그래요. 논리적으로만 계산하면 모든 만남은 비용이잖아요. 시간, 돈, 피로. 그런데 하찮음 하나가 그 비용표를 찢어버려요. 횡단보도를 건너다 발에 걸려 휘청한 장면, 입가에 묻어 있는 밥풀을 떼어주며 “이건 디저트로 남겨둔 거야?” 하고 건네는 농담. 그런 유치한 말들이 생각보다 긴 시간 귓속에 남아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유 없이 덜 외로워요.
대중문화에서 이런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이웃집 토토로>예요. 거대한 사건이 없는데도 전 세계 사람들이 그 영화로 위로를 받아요. 버스 정류장에 선 자매와 토토로가 나란히 서 있는 그 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소리, 길가의 개구리와 눈이 마주치는 짧은 순간. 하찮음의 합주가 하나의 세계를 세워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고음이 난무하고 드라마틱한 선율이 주는 감동도 있지만, 화려한 고음 없이 담백하게 반복되는 멜로디가 어느새 공기를 바꿔놓을 때가 있어요. 요즘 <싱어게인>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노래가 더 큰 울림으로 남을 때가 많더라고요. 노래도 사람도 하루도 거대한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작은 반복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하찮음은 그 반복의 단위예요.
작업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게요. 새 실을 뜯을 때 나오는 종이띠를 책갈피로 써요. 얼마나 하찮고 아름다운 선택인지요. 이 종이띠가 페이지 사이에 꼼꼼히 끼어 있을 때 묘한 든든함이 있어요. 의미를 붙이자면 끝도 없겠지만 사실 별 의미는 없어요. 그런데 그 무의미 덕분에 하루가 부드러워져요. 지하철보다 버스를 더 자주 타는데, 버스에서는 일부러 이어폰을 끼지 않고 창밖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 간간히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요. 내릴 때 기사님이 듣지 못하시더라도 가볍게 인사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별것 아닌 내용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창밖 풍경도 마음을 열면 꽤 기분 좋은 것들로 변하거든요. 하찮음의 빈도는 우리 정서의 베이스라인을 바꿔 놓기도 해요. 여러 심리 연구에서도 작은 친절과 사소한 기쁨의 빈번함이 삶의 만족도를 끌어올린다고 하잖아요. 위대한 한 번보다 하찮은 열 번. 체온은 이벤트가 아니라 빈도로 정해져요.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반대로 살아가요. 완벽함을 향해 달리고, 실수를 지우고, 빈틈을 가리고, 하찮음을 검열하죠. 성과의 그래프는 예쁘게 올라가도 마음의 그래프는 평평해져요. 평평함은 편안함일 수 있지만 오래가면 감각이 무뎌져요. 섬유의 세계에서는 평평함이 내구성의 적일 때가 많아요. 모든 장력이 똑같으면 한 번의 충격에도 전체가 찢어지거든요. 아주 미세한 다름이 충격을 분산시키고 망가지지 않게 지탱해요. 관계도 그래요. 서로의 하찮음이 완충 역할을 해요. 어색한 농담, 가끔의 동문서답, 실없는 대화. 그 작은 순간들이 날카로운 마음을 둥글게 만들어줘요.
키링남과 저는 가끔 바보 같은 농담을 주고받아요. 정말 유치한 것들이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말도 안 되는 농담 따먹기를 하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를 것들에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곤 해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세계가 더 촘촘해져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그러니까 멍하니 떠다니는 생각의 채널이 관심을 끌어당기는 방식이 바뀌는 느낌이에요. 세상이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제가 세계를 한 땀씩 붙잡아당기는 감각이 생겨요. 이건 명상에서도 중요해요. 숨을 들이마실 때 코끝의 시원함, 내쉴 때 목 뒤의 따뜻함을 알아차리는 그 미세한 감각. 거창하진 않지만 마음을 현재에 정박시키는 닻이 되죠.
김애란 작가의 단편에서도 종종 그런 순간이 나와요. 큰 사건이 없는데도 독자가 갑자기 어딘가를 훅 들여다보게 되는 문장들. 이를테면 <달려라, 아비>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요.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식탁 위 비스듬한 그림자나 누군가의 어설픈 걸음걸이 같은 장면이 동시에 떠올라요. 웃기지만 조금은 우스워지는 쪽, 그 하찮은 쪽이 오히려 관계를 지탱한다는 말처럼 들리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루틴과 하찮은 물건, 작고 어설픈 표정들에 마음을 내어줘요. 그런 하찮음이 다리처럼 우리와 세계 사이를 이어주고, 그 다리를 건너는 동안 우리는 덜 외로워져요. 결국 ‘행복’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해요. 부드럽게 어긋난 젓가락, 세 개만 들어간 얼음, 건너오다 휘청한 뒤 민망해서 웃어버린 얼굴. 그런 장면들이 하루를 기적처럼 버티게 해요.
오늘 전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세상을 구하는 건 엄청난 위업이 아니라, 너무 하찮고 그래서 너무 소중한 것들의 빈번함이에요. 건너오다 휘청하는 누군가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떨어진 밥풀 하나를 떼어주고, 종이띠를 책갈피로 쓰고, 버스 기사님께 내릴 때 인사를 건네보는 것. 위대한 한 번보다 하찮은 열 번. 하찮은 열 번의 합이 우리 체온을 만들고, 체온이 태도를 만들고, 태도가 결국 우리의 인생을 엮어요. 실로 말하자면, 그건 ‘나의 무늬’가 돼요. 완벽한 무늬는 지루하고, 하찮은 무늬는 아름답죠. 그래서 오늘도 실수에는 조금, 느림에는 조금, 귀여움에는 많이 기울여요.
오늘 하루에 ‘너무 하찮고 소중한 것’을 하나 포착해보세요. 사진으로 찍어도, 메모로 남겨도, 마음속에 표시만 해도 좋아요. 잠들기 전 속으로 이렇게 말해보세요. “오늘 나 좀 귀여운 듯.” 그러면 내일이 조금 더 부드럽게 시작될 거예요.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예요.
여기까지 함께 걸어와 주신 당신. 휘청해도 다시 중심을 잡는 그 장면을 자꾸 떠올리게 돼요.
너무 하찮고, 그래서 너무 소중해요.
내일은 오늘보다 하나만 더,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 소중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