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모두 가톨릭이에요. 저랑 동생은 냉담자가 된 지 오래지만, 엄마는 지금도 매일 새벽에 기도하러 가세요. 새벽 다섯 시. 일정한 박자로 준비하고 성당으로 향하는 그 리듬이 엄마의 생활 규칙이자 마음의 리추얼이에요. 가족의 건강과 집안의 평화를 빌며 두 손을 포개고 앉아 있을 엄마를 떠올리면, 저는 믿음에서 멀어졌음에도 그 장면이 유난히 애틋해요. 잔소리라 여겼던 말들도 그 새벽 공기와 함께 생각하면 다른 결로 들려요. 엄마의 가장 익숙한 언어가 사랑이라는 걸, 그 리듬이 오래도록 우리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 왔다는 걸 아니까요.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참 묘해요. 밖에서 보면 울퉁불퉁한 나무 판자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공기부터 달라요. 설거지하는 물소리, TV 소리, 소파에 털썩 누워 별것 아닌 프로그램을 틀어 놓는 게 왜 그렇게 편한지. 집에 가면 유난히 졸린 것도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몸이 기억하는 안정감의 단서들이 문을 여는 순간 켜지는 것 같아요. 동시에 나만 느끼는 작은 가시들도 있죠. 독립해 바깥바람을 실컷 들이마시다 돌아오면 실내 공기가 갑자기 너무 진해 어지러운 순간이 생기거든요. 따뜻함이 과해지면 답답함이 되는 그 역설. 그걸 나쁘게만 보지 않으려 해요. 내 세계가 확장됐다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그런 작은 가시들로 따끔거릴 때면 “아, 내가 컸구나. 어른까지는 아니어도 준 어른쯤은 됐네” 하고 웃어 넘겨보려고 해요. 울타리를 부술 필요도, 완전히 떠날 필요도 없는 거죠. 키가 커져 시야가 달라졌을 뿐이라고 받아들이면 억울함이 줄어요.
명절에 꼭 듣는 “너는 왜 그렇게 바쁘니”도 예전에는 “왜 자주 안오니, 연락 좀 자주 하지” 이런 말로 들렸는데, 요즘은 “너도 사느라 애쓴다”로 번역하려고 노력해요. 해석의 각도를 조금만 틀면 마음 온도가 달라지더라고요. “결혼은 언제 하니”를 “너의 행복에 관심이 많다”로, “애는?”을 “네 인생의 다음 장을 함께 축하하고 싶다”로 옮겨 읽어 보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선 말이 칼처럼 꽂힐 때가 있죠. 그럴 땐 심호흡부터 해보세요. 스스로에게 씌워 주는 산소호흡기라고 생각해보세요. “괜찮아. 잘하고 있어. 조금만 버텨.” 그리고 물 한 잔 마시고. 그런 작은 제스처가 마음의 난기류를 잠깐이라도 가라앉힐 때가 많습니다.
수다 팁도 하나 덧붙일게요. 대화가 꼬인다 싶으면 컵라면처럼 뜨거운 물만 부으면 풀리는 주제를 꺼내 보세요. 집 근처 새로 생긴 빵집, 조카가 요즘 빠진 공룡 이름 대기, 강아지가 방문 여는 스킬을 터득했다는 소식 같은 것들요.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테이블의 온도를 한 톤 밝게 만들어 줘요. 그러다 보면 서로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요. “요즘 소화가 안 돼서 매실즙 먹어.” 같은 말 한마디가 그 집의 만병통치약 사전까지 활짝 열어 주기도 하고요. 인생의 대서사는 사실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로 튼튼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추석의 하이라이트, 보름달. 저는 보름달을 보면 저절로 자세가 정돈돼요. 고개를 들고 어깨 힘을 빼고, 호흡을 천천히 맞추다 보면 소원을 빌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하나만 빌어요. 거창한 소원 대신 “내일 아침 눈을 뜰 때 마음이 오늘보다 조금 가벼웠으면 좋겠다”, “엄마가 발목이라도 삐끗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 단톡방에 웃는 이모티콘이 더 늘면 좋겠다” 같은 소원들요. 보름달 아래서, 믿음의 방식은 다르지만 엄마의 새벽 기도와 제 소원이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는 걸 느낍니다. 이번 추석 달 아래서 당신은 어떤 소원을 빌고 싶으세요? 누가 묻지 않아도 괜찮아요. 속으로 한 줄만 또렷하게 적어 보세요. 다른 누구의 언어가 아닌 당신만의 문장으로요. 그 문장을 가슴 주머니에 넣고 돌아오면 다음 날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질지도 몰라요.
귀가하는 차창에 달라붙은 밤공기와 함께 오늘의 나를 채점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 질문에 왜 그렇게 급하게 웃었지?” 같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하고, “그래도 오늘은 꽤 자연스러웠다”는 셀프 칭찬이 따라올 때도 있죠. 그때 저는 일부러 폰을 보지 않아요. 방해 금지 모드로 두고, 자연스러운 소음 속에서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 봅니다. 그러면 마음속 ‘내 편’이 등을 톡톡 치며 말해요. “수고했어. 오늘도 네 페이스 지켰다.” 우리가 바라는 건 거창한 인정이 아니라, 그 작은 토닥임 하나일지 몰라요. 울타리 안에서 조금 답답했고 울타리 밖에서 조금 쓸쓸했어도, 그 사이를 무사히 건넜다는 감각이 다음 날로 우리를 데려가 주니까요.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이렇게 해보려고 해요. 엄마 밥은 전력을 다해 맛있게 먹고요. 잔소리는 2배속으로 듣고요. 친척들의 질문은 웃어 넘기고, 필요하면 대답을 미뤄도 되고, 잠깐 산책 나갈 자유도 제 편으로 두겠습니다. 집 앞 편의점까지 숨 고르러 다녀오는 것도 훌륭한 기술이에요. 붕어빵이 보이기 시작했던데, 돌아올 때 붕어빵 한 봉지 들고 오면 더 좋고요. 잠깐만 지나면 별 탈 없더라고요.
우리는 ‘왔니’라는 환영의 말들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따뜻함과 불편함이 줄다리기하는 동안 잃지 말아야 할 건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호의라고 믿습니다. 그 호의 속에는 서로의 소원을 존중해 주는 마음도 들어 있어요. 엄마의 새벽 기도와 나의 보름달 소원이 다른 언어로 적혀 있어도, 결국 지향은 같잖아요. 건강, 평화, 서로의 안녕이요.
이번엔 어디부터 들르실 건가요? 가면 제일 먼저 뭐 드실 건가요? 저는 도착하자마자 동그랑땡부터 부치고, 떡을 입에 물고, 소파에 벌러덩 누워 보지도 않는 TV를 켜다가, 부엌에서 엄마랑 수다를 좀 떨 거예요. 설거지는 제가 어떻게든 뺏어서 해볼게요. 밤에는 밖으로 나가 달을 한 번 보고, 집으로 돌아오며 제게 문자 하나 보낼 겁니다. “오늘의 미션 완료.” 이 계획, 꽤 괜찮죠? 이번 추석도 우리 충분히 괜찮게 보낼 수 있어요. 그 사이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면 더 좋고요.
잘 다녀오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바로 그런 연휴가 되길 바랍니다. 추석 잘 보내고, 푹 쉬고, 잘 먹고, 그러고 다시 만나요.
다음 주 추석 연휴와 함께 2주간 잠시 쉬었다가 바로 돌아올게요.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