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언제 독이 되고, 언제 약이 될까요? 저는 이렇게 구분합니다. 첫째, 원인 통제 불가능 영역을 구분하기. 내 기술과 준비로도 바꿀 수 없는 변수들, 예를 들어, 예산 컷, 조직의 정치,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 타인의 감정과 같은 것은 내 바운더리 밖입니다. 여기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과잉책임에서 나를 구해내는 안전벨트가 됩니다. 둘째, 결과 책임의 일부 환수. 내 선택과 말, 행동에서 비롯된 파문은 “어쩔 수 없다”로 지울 수 없죠. 상대에게 상처를 줬다면 사과하고 수습해야 합니다. 셋째, 학습의 재투자.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내가 바꾸거나 대비할 수 있는 작은 레버를 찾고 반복하는 것. 결국 이 셋을 합치면 “태도”가 됩니다. 불가항력 앞에서의 겸손, 내가 끌어당긴 결과에 대한 책임, 그리고 다음을 위한 설계.
영화에는 빛이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는 대개 햇살을 따뜻함으로 기억하지만, 어떤 날의 빛은 유난히 날카롭고 잔혹하죠. 화면을 무심히 찌르는 한낮의 빛 앞에서 아이가 손바닥을 들어 아버지의 눈을 잠깐 가려주는 장면이 있어요. 손바닥만 한 그늘, 아주 짧은 평화. 그 직후 비극의 전조가 따라붙는 아이러니. 저는 그 장면이 삶의 축약 같았습니다. 거센 빛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늘을 만들고 숨을 고르고 다음을 고르는 것뿐. 그 그늘은 사랑일 수도, 사과일 수도, 혹은 침묵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빛을 욕하지 않고 그늘만큼의 선택을 만드는 태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도망의 변명이 아니라 잠깐의 그늘로 만드는 일입니다.
말을 좋아하고 유머를 사랑하지만 마음대로 말하고 웃고만 있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요즘 실수를 줄이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씁니다. 첫째, 딜레이 1초. 농담이 떠오르면 아주 잠깐 숨을 들이마십니다. 그 잠깐 사이에 내가 지키고 싶은 경계 하나를 떠올려요. 듣는 사람의 오늘을 가볍게 하는지, 아니면 긁는지. 둘 중 하나라도 애매하면 그냥 삼켜요. 둘째, 리페어의 용기. “방금 그 말, 제가 경솔했어요. 미안해요.” 이렇게 바로 고치면 실수의 여운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집니다. 셋째, 회수보다 설계. 집에 와서 이불킥이 많았던 날은 나중에 같은 자리에 앉을 미래의 저를 위해 문장 하나를 만들어 둡니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남기는 짧은 가이드죠. “그땐 그때의 정보로 최선을 택했다. 다음엔 한 박자 늦추고 질문 하나.” 이런 셀프 가이드는 “어쩔 수가 없다”와 “그래도 할 수 있다” 사이에 작은 다리를 놓아줍니다.
일에서는 더 단단한 매뉴얼이 필요합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A4 한 장에 두 칸을 그려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바꿀 수 없는 칸에 들어간 항목은 초반에 팀과 공유해 리스크라고 선언해 둡니다. 리스크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사람들은 그 문제를 개인 탓으로 덜 돌리게 되죠. 또 무산될 확률이 있는 제안은 애초에 모듈형으로 설계합니다. 본 제안이 엎어져도 일부 모듈은 다른 곳에 재활용할 수 있게 자료 구조를 짜두면 실패의 비용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내부 사정으로 뒤집히는 날,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 보내는 메일 한 통이 있습니다. “오늘 결정 이해합니다. 다만 이번 방향이 팀 목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공유 부탁드립니다. 다음 제안에 반영하겠습니다.” 자존을 지키면서도 다음의 문을 닫지 않는 문장, 억울함을 날로 삼키지 않고 배우는 쪽으로 흐름을 바꾸는 문장입니다.
감독 코멘터리에서 오래 붙잡힌 문장이 하나 있어요. 실직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다. 이 문장을 삶 전체에 붙여 보고 싶습니다.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다. 관계의 위기 자체가 아니라, 그 위기에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듣느냐가 문제다. 누군가 우리를 시험하듯 던지는 운명의 변수 앞에서 지금 택할 수 있는 건 태도뿐.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는 현실에 깔린 제약을 인정하고 나를 다음 선택으로 밀어주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입에 올린 다음엔 반드시 이어져야 하는 문장 하나. 그러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두 문장을 붙여 쓰는 것이 책임과 자유를 동시에 세우는 태도라고 믿어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고 갈게요. 긍정은 “다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닙니다. 긍정적인 태도란, 불편과 손실과 후회의 잔여물을 지우지 않고도 그 안에서 작동 가능한 점을 찾는 시도예요. 악취 나는 방에 향만 뿌리는 게 아니라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일에 가깝죠. 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이 우리는 숨을 고르며 견뎌야 합니다. 감독이 말한 공감과 거리두기의 진자 운동처럼요. 스스로에게도 그래야 하고, 타인에게도 그래야 합니다. 밀착해서 따뜻하게 이해하려다가, 한 걸음 물러서서 경계를 세우는 일, 둘 다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자존을 오해합니다. 낯선 강경함으로 밀어붙이면 단단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건 무장이지 자존은 아니더라고요. 진짜 자존은 고쳐 말할 줄 아는 용기, 멈출 줄 아는 절도, 수용과 설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기술. 기술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늘 작은 질문에서 시작하니까요. 지금 내가 하는 방식이 정말 우리가 지키려는 것을 지키는 방법인지, 아니면 내 불안을 가리는 익숙한 방패인지. “어쩔 수 없다”가 오늘 내게 도망의 문장인지, 숨 고르기의 문장인지. 이 질문만 해도 비극의 경사가 완만해지고, 느려지면 우리는 선택할 시간을 벌게 됩니다.
개인적인 얘기 하나만 더. 제 농담이 누군가를 베어버린 날이 있었어요. 의도는 가벼웠는데 결과는 무거웠죠. 머릿속엔 백 가지 변명이 줄 섰습니다. 분위기가 그랬고, 다들 웃었고, 그 사람도 웃었고… 그런데 인정의 문장 하나가 그 모든 변명을 멈추게 하더라고요. 내가 잘못했어. 다음 날 아침, 두 문장을 보냈습니다. “어제 내 말, 서툴렀어요. 불편했다면 미안해요.” 답장은 짧았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그 짧음이 우리 관계의 새 페이지가 되었어요. 정면으로 마주한 책임은 관계를 얇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께를 더해요. 내 안의 수치심은 통찰로 바뀌고, 다음의 설계가 생깁니다. 그날 저는 조금 늙었지만, 더 편해졌어요.
우리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의 대부분은 영향권 밖의 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데 쓰이더라고요. 날씨를 미워하고, 타인의 표정을 해석하고, 이미 끝난 결정을 반복 재생하는 일들. 그래서 저는 하루에 한 번, 아주 짧은 점검을 합니다. 오늘 내가 붙잡고 있던 것 중 내 손을 떠난 건 무엇이었는지. 떠난 것들은 수조 같은 투명한 상자에 넣어두고, 물을 갈듯 생각을 갈아줍니다. 상자에는 손을 넣지 않아요. 대신 내 책상 위의 작은 것들을 움직입니다. 메일 한 통, 문장 한 줄, 파일 정리. 집 안을 정리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에요. 작은 것들이 내일의 태도를 바꾸고, 태도가 모래알처럼 모여 운명의 표면을 바꿉니다.
추석엔 보름달이 밝았고, 오늘은 그믐달이네요. 달도 늘 차거나 기울거나, 어쩔 수 없는 궤도를 도는 중이죠. 우리도 그래요. 어쩔 수 없는 나의 성향, 어쩔 수 없는 현실,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그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두 문장을 잇대어 말해보려 합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이 두 문장을 붙여 쓰면, 변명은 기초가 되고, 수치는 통찰이 되고, 실패는 설계가 됩니다. 관계는 조금씩 두꺼워지고, 일은 다시 굴러가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이 줄어들어요.
당신에게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을 거예요. 이미 던져진 말, 끝난 프로젝트, 타인의 마음. 그 앞에서 아주 조용히 고백해 보세요.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두 문장 사이에 숨을 한 번 길게 쉬고, 작은 행동 하나를 고르세요. 메시지 한 통, 문장 하나, 혹은 침묵도 좋아요. 그 작은 행동이 내일의 태도를 바꾸고, 태도가 조금씩 운명의 모양을 바꾸니까요. 오늘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좋았다면, 한 사람에게만 조용히 건네 주세요. 그 사람의 밤에도 손바닥만 한 그늘이 필요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