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미지도 만들고, 영상도 만들고, 오브제도 만듭니다. 과정은 늘 허우적이고 실패하고 다시 만들기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결과가 공개되는 순간 세상이 아주 유창해집니다. 처음 보는 사람도 한마디 얹기 쉬워지고, 아이디어가 어디서 그렇게 솟아나는지 의견이 풍년이 되죠.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톤은 더 세련되게, 결은 더 매끈하게, 와우 포인트는요?” 그 말을 들을 때 속이 갑갑해집니다. 말은 유창한데 문서는 없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안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다만 그 제안이 과정의 무게를 한 번쯤 상상한 다음에 나온 말이면 좋겠습니다. 메일 한 통, 문서 한 장. 비용과 일정, 제약과 리스크, 함께 넘어야 할 산들을 먼저 정리해 주는 태도. 요란한 칭찬보다 조용한 정리가 훨씬 큰 존중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착각은 요즘 더 심해진 것 같아요. 한 달짜리 공정을 15초 릴스로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으니까요. 편집은 실패의 조각, 기다림의 시간, 조율의 기록을 칼로 무 자르듯 덜어냅니다. 남는 건 매끈한 타임라인뿐. 유창함이 많을수록 쉬워 보인다는 착각은 더 강해집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하죠. 회의실에서 영어 몇 스푼, 비유 몇 숟가락, 표 몇 장이면 있어 보입니다. “이 이슈는 심리스한 경험이 중요해요. 와우 포인트가 없거든요. 저는 여기 퀘스천 마크예요.” 그런데 “문서로 정리해볼까요?”라는 말이 나오면 공기가 달라집니다. 말의 유창함과 일의 난이도는 별개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곤 하죠.
인지심리학에서 이러한 착각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익숙하고 선명하고 술술 읽히는 정보는 실제보다 더 잘 이해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대요. 잘 읽힌다는 감각이 곧 잘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장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 감각에 설득됩니다. 발표가 매끄럽고 문장이 부드럽고 결과가 반질반질할수록 “나도 할 수 있겠는데?”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여기에 운율까지 얹히면 더 위험하죠. 입에 착 붙는 문장이 검증을 건너뛰게 만듭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아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매끈함은 사실의 증거일까, 포장의 효과일까.
작은 전시 하나만 떠올려도 답이 나옵니다. “공간 빌리고 작품 걸면 끝 아닌가요?” 실제로는 장소 섭외, 보험, 운송과 포장, 온습도와 조도, 오프닝 일정, 저작권, 캡션과 도록 교정, 안내 스태프 교육, 결제 동선, 클레임 대응까지 이어집니다. 목록을 펼쳐 놓는 순간 유창성 착각은 조용히 사라져요. 할 일이 보이면 말이 줄어듭니다. 디자인 의뢰도 비슷합니다.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되고, 러프한 느낌을 가미하되 우아한 터치를 더해주세요.” 문장은 유창하지만 기준은 없죠. 이미지 소스와 라이선스, 타이포 자간과 행간, 색 대비, 인쇄와 웹 규격, 납기 변동 같은 항목을 합의하기 시작하면 ‘고급스럽게’는 자연히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언어로 바뀝니다. 고급은 1초면 말할 수 있지만, 설명하려면 몇 페이지가 필요한 개념이니까요.
공부도 예외는 아닙니다. 너무 잘 읽히는 교재만 붙들면 이해한 것 같지만 응용이 막힙니다. 반대로 약간 빡빡한 문장을 천천히 씹으면 시간은 늘어나도 실전은 빨라져요. 저는 초안을 만들 때 일부러 두 버전을 씁니다. 아주 유려한 버전과 일부러 삐걱거리게 설명한 버전. 두 텍스트를 교차로 보면 매끈함이 감춘 구멍이 드러납니다.
저 역시 남의 결과물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던 적이 있어요. “이 정도면 나도 하겠는데?” 그러다 제 작업의 과정을 곱씹어 보면, 초안, 실패, 수정, 지워진 문장, 뒤집힌 도안, 밤샘 기록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습니다. 그 모든 흔적을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하는 일 자체가 모순이죠.
나 또한 one of them이었다는 거 인정해야겠죠. 남이 하는 건 쉬워 보인다고 믿던 사람 중 하나였다는 걸요.
현실의 비용을 모른 채 “금방 되죠?”라고 던지는 말도 조심해야 해요. 결과를 본 뒤 아이디어가 샘솟는 건 인간적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거든요. 과정의 비용을 모른 채 즉시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순간 타인의 시간을 공짜로 쓰게 됩니다. “이 톤으로 전체를 다시요. 어렵지 않죠?”, “영상은 두 배 길이로, 일정은 그대로요.”, “견적은 나중에요.” 이런 말들을 들으면 속으로 경고를 울립니다. ‘도망쳐!’
말이 매끈할수록 실제 난이도는 더 가려집니다. 반대로 과정의 일부라도 함께 겪으면 말수가 줄어요. 스케치와 폐기, 파일 정리, 버전 관리, 반복 확인, 마감 앞의 침묵을 옆에서 한 번만 봐도 표정이 달라집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보통 이겁니다. “우리 할 수 있는 선에서 조정해보죠.” 그 한마디가 서로의 시간을 구하고 결과를 현실로 끌어옵니다.
저는 요즘 결과물을 볼 때 마음속에서 작은 루틴을 돌립니다. 먼저 “나도 하겠는데?”가 올라오죠. 곧바로 덧붙입니다. “아니야, 그거 착각이야.” 그 한 문장이 판단을 잠깐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묻습니다.
보이지 않는 과정은 뭐였을까.
내가 직접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지금 내가 내는 말은 상대의 시간을 벌어줄까, 뺏을까.
이 세 질문만으로도 말의 밀도가 꽤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유창성 착각을 줄이기 위해 제가 쓰는 일곱 가지 규칙을 적어둘게요. 리스트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저 자신을 붙잡아두는 고삐같은 것들입니다.
유창성 착각을 피하기 위한 7가지 규칙
- 보이지 않는 업무를 목록화한다. 내가 보지 못한 노동을 상상 리스트로 적는다.
- 말보다 문서를 먼저 낸다. 채팅 세 줄이면 문서 열 줄로 옮긴다.
- 숫자를 먼저 제시한다. 예산, 일정, 길이, 해상도, 버전 수를 먼저 둔다.
- 반례 한 개를 준비한다. 내 주장과 반대되는 상황을 미리 적고 대응 방안까지 붙인다.
- 검증 시간을 넣는다. 매끈한 결론 직후 최소 하룻밤을 재운다.
- 최소 단위를 해본다. 썸네일 한 장, 30초 시안, 문단 하나라도 직접 만들어본다.
-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수고를 본다는 말을 먼저 건넨다.
클라이언트 입장에 있는 분들께 현실적인 팁도 하나 드리고 싶어요. “이건 그냥 대충”이라는 말은 마법의 주문이 아닙니다. 대충은 보통 더 오래 걸려요. 기준이 없으니 되돌아 가는 과정만 반복되거든요. 차라리 “이 세 가지 중 하나로 골라주세요”처럼 선택지를 주세요. 선택지는 대화의 윤리입니다. 서로의 시간을 아껴줍니다. 반대로 저와 같은 제작자의 입장에 있는 분들도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내 유창함이 타인에게 착각을 주지 않도록 말이 아니라 근거를 탁자 위에 올리면 됩니다. 작업 파이프라인을 보여주고, 결정의 이유를 기록하고, 버전 차이를 설명하세요. 매끈한 결과만 내놓으면 상대는 언제나 “금방이었겠네”라고 오해합니다. 과정의 기록은 방어가 아니라 다음 프로젝트를 더 명확하게 만드는 투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규칙을 나에게도 적용해보면 좋겠어요. 타인의 유창함만 쉬워 보이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의 나도 아주 유창하거든요.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자주 말합니다. “이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아.” 계획의 유창함이 실제의 어려움을 덮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메모장 첫 줄에 적습니다. 금방 되는 건 없다. 쉬운 건 없다. 시간, 단계, 버전, 마감, 휴식이 표에 들어오는 순간 비로소 나도 나를 존중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남이 하는 건 쉬워 보인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다음에 누군가의 결과물을 보거나 내 계획이 유난히 매끈해 보일 때, 이렇게만 해볼까요. “나도 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 잠깐 멈추고 덧붙입니다. “아니야, 그건 착각이야.” 그 한 박자의 틈이 우리를 조금 더 정확하게, 그리고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만들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