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갤러리에서 저는 정확히 제 속도를 멈춰 세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신작 앞에서 누군가가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대화 소리가 잠깐 끊기고 공기가 얇아지던 그 찰나. 그때 알았어요. 제가 부러워한 건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관객을 잡아 둔 그 순간’이었다는 걸요. 그렇다면 문제는 비교가 아니라 재현입니다. 내 자리에서 그 순간, 그 장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 질문이 문장으로 서자 손이 당장 움직일 근거가 생겼습니다.
작업실로 돌아와 책상을 치우고 작업 노트를 한 장 넘겼습니다. 왼쪽 위에 날짜, 오른쪽 위에 시간을 적고 가운데에는 한 줄만 썼어요. “관객의 순간을 잡아 둔 그때.” 짧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순간만 기록하니 마음이 둥글어집니다. 관람객의 코끝에서 멈춘 숨, 조명이 비스듬히 바뀌며 표면의 결이 달라지던 찰나, 바닥에서 아주 미세하게 올라오던 냄새. 공격할 대상이 사라지고 따라갈 방향만 남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질투를 작업의 연료로 삼기로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다뤄보고 싶어 사두었던 재료가 있었거든요. 볏짚입니다. 늘 손대 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치곤 했죠. 이참에 ‘시작’을 배우자 싶어 짚풀생활사박물관 체험 프로그램에서 금줄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금’은 금(Gold)이 아니라 금(禁), 금지의 뜻이라고 하더군요. 보통 새끼줄은 오른손으로 비트는 ‘오른새끼’가 기본인데, 금줄은 반대로 ‘왼새끼’로 꼬아 경계를 세웁니다. 흐름을 거슬러 문턱을 만드는 방식이에요.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지요.
저는 그 금줄을 제 감정에 그대로 대입했습니다. 나를 갉아먹는 질투의 칼날은 무디게 하고, 필요한 것은 통과시키고 싶었습니다. 한 올, 한 올 왼쪽으로 비트는 동안 손끝에서 ‘거스르는 리듬’이 생기고 머릿속 속도는 자연스레 차분해졌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짧게 중얼거렸어요. “액운은 막고, 행운은 들인다.” 금줄을 들고 작업실로 돌아와 매듭 위를 금사(金絲)로 감아 마무리했습니다. 여기서 두 ‘금’이 겹칩니다. 금(禁)은 액운의 진입을 막는 경계, 금(金)은 소중한 것을 지키겠다는 의지. 막는 ‘금’으로 둘러치고, 지키는 ‘금’으로 묶는 셈입니다. 볏짚의 꼬임 사이에는 작은 한지 표식을 붙였고, 아래쪽에는 숯 조각을 달았습니다. 가장자리에는 마른 고추와 솔잎을 가볍게 묶었어요. 정화와 액막이의 상징이 서로 기대어 서 있으니, 경계는 벽이 아니라 보호와 환대가 함께 작동하는 문턱이 됐어요. 완성한 금줄을 작업실 입구에 걸고 한 걸음 물러서니 마음이 낯설 정도로 고요해졌습니다. 단어로만 맴돌던 감정을 사물로 만들어 바깥에 걸어두니, 그 감정이 더 이상 제 등을 세게 밀지 않더라고요.
이 지점에서, 질투가 왜 ‘가까움’에서 더 뜨겁게 타는지 설명해 주는 연구 하나를 얘기해볼게요. 테서와 스미스(Tesser & Smith)의 실험인데, 참가자들은 친구 혹은 낯선 사람과 짝을 이뤄 ‘패스워드’ 게임(단어 맞히기)을 했습니다. 참가자는 파트너에게 힌트를 쉽게도, 어렵게도 줄 수 있었고, 어떤 참가자에게는 “이 게임이 당신의 중요한 능력을 측정한다”고, 또 어떤 참가자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결과가 흥미로웠어요. 과제가 나에게 중요하다고 믿을수록 사람들은 낯선 사람보다 오히려 친구에게 더 어려운 힌트를 주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반대로 덜 중요하다고 믿을 때는 친구에게 더 쉽게 도왔고요. 정리하면, 친밀감과 자기 관련성이 높을수록 질투의 불꽃이 켜지고, 그 강도는 ‘도울지 말지’ 같은 아주 작은 행동에도 스며듭니다. 멀리 있는 슈퍼스타보다 나와 같은 트랙에 있는 사람에게 더 민감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실험을 떠올리니 제 마음의 지도도 조금 더 명확해졌습니다.
그 지도 위에서 질투와 선망의 경계가 또렷해졌어요. 선망은 둘의 일입니다. 타인이 가진 것을 나도 갖고 싶을 때 올라오는 매끈한 동경. 질투는 셋의 역학이에요. 내가 갖고 있거나 갖고 싶던 무엇이 타인 쪽으로 넘어갈까 봐 생기는 상실의 불안. ‘삼체 문제’처럼 좀 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 같았죠. 제가 느낀 감정은 질투였을까요, 선망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경계에 선 감정이었을까요. 중심축은 질투로 기울어 있었고, 그래서 아팠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지도가 될 수 있어요. 통증이 나는 곳을 짚어야 약을 바르는 것처럼, 왼새끼로 엮은 금줄은 제 감정의 지도와 정확히 겹쳤습니다. ‘막을 것’과 ‘들일 것’의 위치를 손이 먼저 알아채더라고요.
가까운 사람의 좋은 소식이 겹치는 날이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축하와 작아짐이 동시에 올라오니까요. 그럴 때 저는 순서를 바꿉니다. 현장에서는 축하를 충분히 먼저 말하고, 내 감정은 나중에 짧게 기록해요. “오늘 나는 조금 작아진 기분이 들었다.” 상대를 해석하지 않고 내 체험만 적어 두면 공기의 압력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다시 손으로 돌아갑니다. 책상 표면을 한 번 닦고, 연필을 짧게 깎고, 어질러진 재료를 제자리로. 오늘 쓸 것만 앞으로 꺼내 놓습니다. 타이머를 맞추고, 그 시간 동안에만 손을 움직입니다. 결과를 서두르지 않고 온도를 확인하는 시간이더라고요. 감정은 말보다 움직임에 먼저 설득된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기억하더군요.
밤에 누우면 비교가 시작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벽걸이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숫자 대신 장면을 셉니다. 숨 하나, 빛 둘, 멈춤 셋. 세 번째쯤 되면 손끝이 내일의 동작을 먼저 떠올려요. 볏짚은 어느 길이로 묶을지, 금사는 몇 바퀴로 감을지. 구체가 불안을 줄입니다. 불안은 형태 없는 것과 친하고, 평온은 구체와 친하니까요. 이렇게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마음의 바닥이 가지런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며칠 뒤 같은 전시장을 다시 찾았을 때, 이번에는 작품 앞에 선 작가의 뒷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어깨가 아주 조금 굽어 있었고 신발 끝이 바닥을 사소하게 긁고 있었어요. 그 자세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발표의 공기는 결국 누군가의 조용한 어깨에서 만들어지는구나. 나는 내 어깨로, 내 손으로, 내 책상으로 그 공기를 만들면 되겠구나. 돌아와 금줄의 매듭을 한 번 더 눌러 보니 단단합니다. 작업실 문턱에 걸린 그 한 줄이 오늘도 저를 제 자리로 데려옵니다. 질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사용됩니다. 바깥을 베던 칼에서, 안쪽을 다듬는 칼로요.
저는 요즘 이런 상상을 자주 합니다. 혼자 있는 제 손을 들어 스스로와 가볍게 하이파이브하는 장면을요. 괜찮아, 잘하고 있어.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충분해. 들어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저는 저의 가장 큰 청중이자 동료니까요. 질투라는 감정을 굳이 부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건 제가 아직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아무 욕망도 없었다면 질투도 없었겠죠.
그래서 오늘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거예요.
혹시 지금 당신도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냥 곁에 두세요.
그리고 그 감정이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들어보세요.
‘나는 뭘 원하는 걸까?’, ‘내가 진짜 바라는 건 뭘까?’ 같은 질문이요.
그 답을 따라가다 보면,
질투는 더 이상 불편한 손님이 아니라,
길잡이가 되어줄 수도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