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삶에 정해진 궤도가 있다고 착각한다. 어떤 선택은 정답처럼 보이고, 그 길만이 맞는 길이라 믿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돌아보면, 그 궤도란 것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그 순간, 그 자리에 맞아떨어졌던 것뿐이다. 조금만 다른 타이밍에, 다른 사람과 마주쳤더라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마치 삼체 문제에서처럼, 한 입자의 위치만 달라져도 미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가는 것처럼.
이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다. 바로 ‘엔트로피’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시스템에서는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가 항상 증가한다. 쉽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지럽혀진다는 뜻이다. 물 컵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잉크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유리는 다시 돌려놓을 수 없고, 공기 중으로 퍼진 향기는 다시 병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처럼 어떤 변화는 되돌릴 수 없고, 그 변화의 방향성은 언제나 무질서 쪽으로 향한다.
이 무질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유지하려 애쓴다. 심장은 일정한 박동을 반복하고, 세포는 복제하며,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그 질서조차 완전하지 않다. 어느 순간 무너지기도 하고, 그 무너짐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결국 삶이란, 무질서를 억지로 붙들어 질서처럼 보이게 하려는 수많은 시도의 집합이자, 그 와중에 생겨나는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의 실험실이다.
‘삼체 문제’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엔트로피 법칙’은 돌이킬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 조건 사이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삶은 언제나 맥락적이다. 지금은 맞았던 선택이, 다른 시간에는 틀린 것이 될 수 있고, 지금은 틀렸다고 여겼던 선택이, 몇 년 후 나를 살리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정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바뀌면 판단도 바뀌고, 시점이 달라지면 해석도 바뀐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반드시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인생은 수학처럼 정해진 해를 구하는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매 순간의 변수들과 상호작용하며, 그때그때의 최선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어떤 확정적인 결론보다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우연과 선택의 무늬들. 나는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창발(emergence)’이다. 복잡계 과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개별 요소들로는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이 전체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개미 한 마리는 그리 똑똑하지 않지만, 수천 마리의 개미는 목적 지향적인 군집 행동을 한다. 신경세포 하나하나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수십억 개의 뉴런이 연결되면 ‘나’라는 자아가 생겨난다.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 그 이상이 된다.
이런 창발의 원리는 내 손끝에서도 나타난다. 실을 한 코, 한 땀 짜는 섬유 공예의 세계에서도. 각각의 코는 의미 없는 선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이 반복되고 쌓이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실이 감기고 뒤틀리고 꼬이는 과정 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가 탄생한다. 계획한 대로 짜여진 결과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모양. 그건 실수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우연이 만들어낸 질서이기도 하다.
나는 그 불확실함을 견디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에 실을 감고, 한 코 한 코 짜나가기 시작하면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처음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실이란 건 그저 길고 가는 선에 불과하고, 한 땀은 그저 작은 매듭일 뿐이다. 하지만 반복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다. 같은 동작을 수백 번, 수천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순간 패턴이 만들어진다. 어떤 때는 내가 의도한 대로, 어떤 때는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예를 들어, 나는 원을 만들고 싶었는데 실이 자꾸 옆으로 흘러 사선의 결을 만들기도 한다. 그걸 억지로 다시 펴보기도 하고, 그냥 흘러가게 놔두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조화로운 곡선이 생기고, 그것이 중심이 되어 전체 형상이 다시 균형을 찾아간다. 처음엔 단지 ‘어긋난 코’였던 것이, 나중에는 전체 디자인의 리듬이 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예측할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다. 나는 그것을 ‘질서의 틈에서 솟아오른 우연’이라 부른다. 완전히 내 의지대로 된 것도 아니고, 전혀 엉망으로 흐른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태어난 무늬.
이 흐름은 마치 우주에서 하나의 행성이 만들어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성운이 수억 년에 걸쳐 뭉치고 부서지며, 일정한 회전과 충돌, 무작위적인 입자의 운동 속에서 아주 느리게 형태를 갖추어간다. 처음엔 그저 혼란의 구름처럼 보이던 것이 점점 밀도를 높이며 구심력을 형성하고, 마침내 하나의 천체로 수렴해간다. 나는 내 손끝에서 완성되어가는 작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건 작은 세계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떠다니다가, 마침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세계가 태어나는 과정.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 실패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처음 구상한 모양에서 벗어나는 것,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그것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상과 어긋나는 과정 속에서야말로 진짜 ‘나만의 것’이 탄생할 수 있다. 매번 같은 도안을 따르기보다는, 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는 것. 그 흐름을 믿는 것. 실이 꼬이면 그 꼬임대로, 빠진 코가 생기면 그 틈마저 받아들이는 것. 그게 창발이다. 통제하려는 욕망을 조금 내려놓고, 변화하는 패턴과 대화하는 태도. 나는 그런 태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때때로 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 감정, 작업과 같은 것들을 나의 위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둘러싼 위성들과 상호 작용하고 위성들은 나를 둘러싼 궤도를 만들어간다. 그 속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나의 세계. 구불구불한 실의 흐름 하나하나가 시간이고, 감정이고, 내가 지나온 날들의 흔적이다. 매듭은 고통의 흔적이기도 하고, 반복은 버티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나의 작업은 물리적인 오브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형상이다. 불완전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유일무이한 무늬를 가진 작은 우주.
나는 더 이상 완벽한 궤도를 꿈꾸지 않는다. 대신 그 어긋난 궤적들이 모여 이루는 커다란 곡선을 믿는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되지 않으며, 돌이킬 수도 없는 그 모든 흐름 속에서, 나는 단지 다음의 한 코를 짠다. 그게 언제 어떤 모양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 실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나는 계속 짠다. 실을 감고, 한 땀 한 땀, 나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무질서 속에서 피어나는 질서.
혼돈 속에서 생겨나는 고요.
나는 그렇게 살아간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
그 틈에서 창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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