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제일 먼저 하는 일. ‘스누즈’ 버튼 누르기. ‘다시 알림’을 몇 번씩 누르고 나면 그제야 눈을 반쯤 뜬다. 이불 속에 몸을 말고 휴대폰의 수많은 알림과 메일과 투두리스트를 확인한다. 이미 나의 우선순위는 48번째쯤으로 밀려나고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게 된다. 줄줄이 밀려오는 쓸데없는 정보들에 압도되어 몸을 움직이기 귀찮아진다. 공기는 무거워지고 창밖의 햇빛은 나를 재촉한다. 불안이 나를 덮쳐 다시 잠들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일어나기에는 귀찮다. 그 어중간한 상태에서 나는 다시 눕거나, 이불에 얼굴을 파묻거나, 상체만 침대에 걸친 채 엎드려있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내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그저 ‘조금만 더’라는 말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시간이 하루에 미묘한 균열을 낸다. 조금씩 더해지는 균열은 꽤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다.내가 문제인 거지. 다 내 탓이지. 의지가 부족해서, 뭔가 해보려는 열정이 사그라들어서, 그런 감정이 따라오지 못하니까. 그런가. 아닌가. 정말 그런가. 정말 아닌가. 이건 감정의 문제일까, 시스템의 문제일까. 내 머릿속에는 분명 어제 혹은 어느 시점에 생각했던 계획들이 있는데 내 몸은 왜 따라오지 못할까. 새로울 것이 없다. 반복되기만 한다. 예측을 크게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익숙함은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나를 묶어두고 있다. 아침마다 자동조종 모드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계획이나 결심, 재밌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 같은 것들은 그 틈에 갇혀 사라진다. 움직이기 전에 머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위험을 느끼는 순간 나는 생각한다. 아니, 내 머리는 결정한다. 하던 대로 하기로. 내 삶을 조용히 무너뜨리는 주문이다. 나는 그 주문에 걸려 ‘괜찮아. 하던 대로 하면 돼.’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묘한 안도감에 중독된다. 그 안도감은 괜찮지 않은 상태를 더 지속시킨다. 병을 키우는 것처럼.
하고 싶은 작업이 있고 그걸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분명 알고 있다. 내가 해내고 싶은 일들은 이미 다 알고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생각은 단 하나의 작업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재료를 구하고 새로운 기법을 익히면서도 좀처럼 작업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작업은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밀어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나. 더는 감정 혹은 영감이라 불리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손을 움직여야 한다.나는 스스로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숫자를 세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결심이 비상 제동장치에 걸리지 않도록, 감정에 휘둘리기 전에 의식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말이다. 5, 4, 3, 2, 1. 숫자를 세고 몸을 일으킨다.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서 바로 앉기 위해 침대 옆에 의자도 가져다 놨다.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마신다. 바로 책상으로 가서 노트를 편다. 모닝 페이지-나는 굿모닝! 하고 나에게 인사하는 의미로 굿모닝 페이지라 명명했다-를 쓴다. 억지로 3페이지를 채우지는 않는다. 잠깐이라도 좋다. 완성된 무언가는 아니어도 된다. 완벽한 무언가일 필요도 없다. 움직임의 시작으로 충분하다. 이미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이 진부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다시 알림’을 (거의) 누르지 않게 됐고, 몇 개월 혹은 일 년 가까이 미뤄왔던 일들을 하나씩 조금씩이나마 해나가기 시작했다. ‘스누즈’ 버튼을 누르는 일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침은 여전히 괴롭다. 그다지 개운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을 조금 다르게 본다. 나를 이해하려고 한다. 내가 지금 자동조종 모드구나. 내 뇌는 아직 안정을 원하고, 변화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있구나. 그러면 나는 잠깐 멈춘다.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대신 5초를 세고 비상 제동장치가 켜지기 전에 몸을 먼저 일으킨다. 일어나는 시간이 5분 늦어지든, 굿모닝 페이지를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 5초를 통과하고 있다는 거다.
변화는 그런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머리는 계속 명령할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무리다. 감정은 쉽게 지나가고 머리는 핑계를 만든다. 그 사이 몸을 움직여서 나를 다른 길로 데려간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을 때, 그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뇌는 아주 빠르게 브레이크를 건다. 행동은 늘 감정보다 늦게 온다. 뇌는 익숙한 감정 흐름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행동신경과학자 마르셀 브라스(Marcel Brass)와 패트릭 하가드(Patrick Haggard)는 <To Do or Not to Do: The Neural Signature of Self-Control>에서 이렇게 설명한다.“인간이 자기 통제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 짧은 시간 안에 전전두엽의 회로가 작동해야 한다. 그 개입이 없으면 우리는 자동적이고 익숙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의식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진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이유는, 바로 ‘개입하지 못한 5초’에 있다.그러니 5초 안에, 그저 하면 된다. 철학도 아니고, 의지력도 아니다. 시스템의 작동을 이해하고 그 흐름에 아주 작게 개입하는 일. 나는 이 원리를 알게 된 후, 스스로를 덜 책망하게 되었다. 내가 게을러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니다. 단지 그 짧은 시간을 지나쳐버렸을 뿐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누구나 망설이게 된다. 그것이 익숙하지 않을수록 망설임은 더욱 커진다. 생각은 분명하다. 행동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을 뿐이다. ‘지금이야’싶은 순간이 있지만, 그 짧은 틈에 마음이 물러선다. ‘내일 하자. 다음 주쯤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미루다 보면 하고자 했던 의지는 무언가에 의해 잡아먹힌다. 사라진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생각이, 마음이, 기억 속에서 조용히 퇴장한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됐다고, 조금만 더 정리되면, 좀 더 확실해지면,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되뇐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린다. 멈춰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다고 괜찮다는 허가증이 발급된 것만 같다. 준비 중. 나는 ‘준비 중’이라고 달아놓은 팻말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팻말에 기대기 시작하면 현실은 멈춰 선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다던 일, 작업, 만나고 싶다던 사람, 가보고 싶다던 곳은 어느새 ‘언젠간’이라는 이름 아래 희미해진다.
“완벽한 준비는 오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해하는 말이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려운 거다. 내가 바로 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 시도했다가 어설플까 봐, 부족해 보일까 봐, 내가 하는 시도가 우스워 보일까 봐, 누가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준비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정리를 더 해서 ‘짠!’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사실은 준비가 부족한 게 아니라 용기가 없었던 거다. 움직일 만큼, 시작할 만큼, 감당할 만큼의 용기. 심리학자 티모시 파이킬(Timothy A. Pychyl)은 이런 상태를 ‘정서 기반 저항(Emotional-based Resistance)’이라고 불렀다. 그는 행동 미루기의 핵심이 감정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기 못할 때, 그건 그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일을 시작할 때 느끼게 될 감정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예를 들어, 글을 쓰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 자체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내가 쓴 글이 형편없을까 봐, 실망스러울까 봐,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싫어서 시작 자체를 미루게 되는거다. 게으른 게 아니다. 피하는 거다. 그 회피의 바탕에는 감정이 있다.나의 의지 부족이나 게으름 때문이라고 여겼던 행동의 지연이, 사실은 내면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고 다루어야 할 감정일지도 모른다. 자책하는 대신 감정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태도를 바꿔보기로 했다. 불안이 엄습할 때, 근원을 추적해 보고, 시작이 막힐 때는 ‘내가 지금 피하고 있는 게 뭐지?’라고 자문했다. 내 감정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떻게든 하게 됐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여전히 일이 꼬일 때가 많고, 여전히 쉽게 지치고, 여전히 망설인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멈춘 상태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예전의 나는 ‘안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지금의 나는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작은 차이가 나를 힐난에서 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행동이 언제나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한 걸음 한 걸음이 균열을 조금씩 메워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대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주 생각한다.
삶의 결은 반복적인 선택 속에서 아주 천천히 바뀐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분명 다시 망설일 것이다. 일어날까 말까, 좀 더 잘까 말까. 하지만 망설임 안에 숨은 패턴을 읽을 수 있고, 그 패턴을 끊어내기 위해 5초를 셀 수 있다면, 나는 어제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완벽한 준비, 완성된 계획, 철저한 환경은 오지 않는다. 때문에 ‘준비된 나’가 아니라 ‘움직이는 나’로 살아보려고 한다. 결과보다는 방향, 크기보다는 결, 마음보다 몸을 믿는 방식으로. 우거진 숲에 수많은 발걸음이 쌓이면 길이 된다. 내가 가는 걸음이 길이 될 거다. 나를 증명하는 작업이 될 거다. 나는 오늘도 작업을 해 나가고 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계속해서.
내가 몇 코를 꿰는 동안 누군가도 자기만의 하루를 열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 역시 망설이고, 주저하고, 다시 앉았다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다 나의 자조적인 몇 마디의 문장이 마음에 닿아 아주 잠깐이라도 ‘나도 해볼까?’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면, 이 글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우리의 삶은 거대한 결심보다 사소한 동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바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한 번 해보자는 마음. 거창한 선언보다 일단 움직이는 손끝. 그렇게 모인 5초, 또 5초, 또 한 번의 5초가 쌓여 하나의 계절을 지나게 하고, 삶을 방향을 조금씩 조정해 놓는다.또다시 이불 속에서 괴로워하며 하루를 유예하고 싶어질 거다.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건 유예의 시간을 얼마나 줄여나갈 수 있는지, 주저하는 중에도 다시 숫자를 셀 수 있는지, 다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지다.
5, 4, 3, 2, 1.
그리고 다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