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갈 때마다, 엄마는 밥을 계속 차린다.
“뭐 먹고 싶어?”
“저녁까지 먹고 갈거지?”
“먹을 게 별로 없다. 그냥 간단하게 먹자.”
나는 간단히 먹자는 말이 결코 간단한 식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안다. 비빔국수 하나만 놓인 상에도, 두 손이 어지럽게 오가던 시간이 올라가 있다. 그건 단지 국수가 아니라, 조용히 피워 올린 마음의 온기다. 마음은 늘 뭉툭하게 담겨 있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음식을 하는지, 같이 외식 한번 하면 될 일을 굳이 집에서, 힘들게 하려 드는 마음을.
그런데 그게 사랑이더라. 엄마가 나를 위로하고, 붙잡고,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말로 전해지지 않는 마음은, 소리 없이 올라오는 국물의 온도로, 말간 접시 위에 놓인 김치의 간으로, 입에 넣어지는 것이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다.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무심하게 지나친 순간들 속에서.
사람은 때때로, 누가 내 옆에 있는지를 늦게 알아차린다. 그 존재가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했을지를 떠난 뒤에야 헤아리는 일도 많다. 그래서 나는 작고 사소하고 빈번한 일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자주 반복되는 순간들. 예컨대 엄마가 “국수나 먹자”며 냄비를 꺼내드는 그 오후의 장면을.
그저 그런 식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마음을 이어붙이는 방식이고, 손으로 만든 유대를 밥상 위에 펼쳐내는 사랑이다. 국수를 삶는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면, 그건 삶의 방향이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신호 같았다. 나는 그 증기를 따라,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따뜻한 마음의 형태를 그리곤 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왠지 멀게 들린다. 큰 성공, 강렬한 사랑, 영화 같은 이벤트. 그래야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나는 점점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너무 사소해서 기록조차 되지 않는 순간들이, 결국 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사소함의 반복 속에 평온과 회복이 숨어 있었다. 매일이 같은 듯 보이지만, 매일은 다시 시작되는 무언가로 가득하다. 단조로움은 오히려 삶을 짜는 리듬이 된다.
“매일은 빈 방 천장에 매달린 하얀 전구 같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말이 이해되는 시점이 있다. 멈춘 듯 흘러가는 나날 속에도, 시간은 아주 조용히, 아주 부드럽게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들.
사랑,
마음,
손길,
온기
같은 것들.
그 모든 것이 매일 같은 장면을 통해 천천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심리학자 존 볼비(Edward John Mostyn Bowlby)는 인간의 애착을 생존의 본능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원하고, 가까이 있으려 하고, 떠날 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우리를 반복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받아준 사람이다.
볼비와 메리 에인스워스가 함께 진행한 ‘낯선 상황 실험’은 어린 유아의 반응을 관찰해 애착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보호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울고, 돌아오면 안정을 되찾는 아이는 세상을 믿을 수 있는 곳이라 여긴다. 떠날 때도 무반응, 돌아와도 무심한 아이는, 기대보다 거절에 익숙해진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반가움과 분노가 뒤섞인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는, 사랑받고 싶지만 믿기 어려운 감정을 안고 있다.
이러한 애착 유형은 단지 기질 차이 때문이 아니라, 양육자의 일관성과 감정적 반응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연구의 핵심 결론이었다. 다시 말해, 반복적으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반응해주는 돌봄 제공자, 아이의 울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꾸준히 관심을 주며, 감정을 조절해주는 양육자가 있는 경우 아이는 세상을 ‘예측 가능한 곳’으로 인식하게 되며, 그 경험이 평생의 대인관계, 정서 조절 능력, 스트레스 대응 방식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애착 이론은 성인 관계, 연애, 사회적 유대, 트라우마 회복 등 심리학의 광범위한 분야로 확장되었다. 예컨대, 안정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 조절 능력이 높고, 타인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경향을 보였으며, 반대로 불안정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거절에 대한 과도한 불안, 친밀함에 대한 회피, 감정의 기복 등으로 인해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이론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심리 치료와 정신건강 회복의 핵심 모델로도 작용하고 있다. 심리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내담자가 ‘안전 기지(Secure Base)’를 경험하는 것이다. 치료자와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내면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며, 다시 연결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원하고, 가까이 있으려 하고, 떠날 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신경계에 새겨진 생존 전략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관계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애착은 우리의 내면 지도를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우리를 반복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받아준 사람이다. 단지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라, 내가 무너졌을 때도 변하지 않고 곁에 있어준 사람, 그 사람에게 우리는 마음을 붙인다. 그곳이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이든, 어떤 관계든, 그 존재는 우리 안의 불안을 잠재우는 은신처가 된다. 이처럼 애착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신뢰이며, 반복을 통해 회복되는 희망이다.
행복이란 어떤 상태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 반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버드 대학교의 성인발달연구소는 1938년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을 추적해왔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연구에 따르면, 인생의 질을 결정짓는 요소는 부나 성공이 아니라 ‘좋은 관계’였다. 수십 년에 걸친 추적조사 끝에 남은 결론은 단순했다.
"좋은 삶은 좋은 관계에서 온다."
삶의 가장 깊은 만족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감각, 그리고 나를 받아줄 한 사람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깨어있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누군가다. 인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건 깊고 안정된 관계다.
가족, 친구, 나를 기억하는 공동체.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무너지지 않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
행복은 먼 데 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흔한 순간 속에 있었다. 밥을 같이 먹고, 함께 장을 보고, 살짝 귀찮은 대화를 나누고, 평범한 얼굴을 마주 보는 그 시간.
감히 행복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소소한 기억들이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되어 꽃밭이 되어간다. 그런 기억들이 물들어 퍼져나가면 하나의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 어쩌면 봄은 달력에 적힌 계절이 아니라 그런 추억이 피어나는 방향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엄마가 해 준 밥을 실컷 먹었다. 배가 불러도 차려주는 그 밥상을 모조리 비워냈다. 어릴 적에도, 작년에도, 며칠 전에도 먹었을 밥이었지만 오늘은 좀 더 오래 씹었다.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나는 한때 혼자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기대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고 믿었고, 말하지 않으면 덜 복잡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 가장 아팠던 건, 사실 마음 줄 데가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혼자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게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짜 삶이었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눈에 비친 나, 그 사람이 기억하는 나의 말투, 습관, 표정.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가 없다. 말없이 건네는 물 한 잔,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던 기억, 서랍 속에 몰래 넣어둔 손편지 한 장. 그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신호가 된다. 그리고 그 신호는 몸에 남는다. 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처럼. 빛바랜 사진을 넘기다, 문득 눈물이 고이는 순간처럼.
사람의 몸은 기억한다. 마음이 받았던 환대와 거절을. 그래서 우리는 어떤 손길은 닿기만 해도 긴장이 풀리고, 어떤 눈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인다.
오늘 엄마가 밥을 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그릇을 옮겼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말없이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해받으려 애쓰기보다 그저 곁에 머무는 방식으로.
행복은 그렇게 자라났다. 갈등 없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툴지만 계속 돌아오는 발걸음 덕분에. 다시 말 걸고, 다시 앉고, 다시 웃고, 그 '다시'들이 쌓여서 만든 온기 덕분에.
이제는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누구보다 가까운 이들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말들을 조금은 더 자주 꺼낼 수 있기를. 언젠가 그들이 곁에 없을 때,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후회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날의 식탁처럼, 소소한 사랑이 피어나는 시간들이 우리 인생의 무늬가 되기를. 반복되는 듯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하루하루의 변주들이 결국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기를.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 오늘을 돌아보는 날이 온다면, 나는 이 평범했던 하루를 조용히 꺼내어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음식들이 익어가던 주방의 온도,
쨍한 햇살이 들이치는, 나란히 마주 앉았던 식탁,
웃는 얼굴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건넸던 그 말들.
"많이 먹어."
"이따 장이나 같이 보러 가자.”
그 말들이 다정한 음악처럼 귓가에 맴돌고, 그 장면들이 한 송이씩 피어난 꽃처럼 마음을 물들일 것이다. 사랑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되풀이되는 다정함이다. 그 다정함이 나를 붙들었고, 그 다정함이 나를 살게 했다.
오늘도 나는 다시 사랑을 씹는다.
다시 삶을 삼킨다.
그리고 다시,
가장 가까운 마음에게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