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교의 행동경제학자 샌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프린스턴 대학교의 심리학자 엘다 샤퍼Eldar Shafir는 <Scarcity: Why Having Too Little Means So Much>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했다. 인간은 결핍 상태에 놓이면,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핍은 ‘터널링(Tunneling)’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일으킨다. 터널링이란, 무엇인가 부족할 때 우리의 인지적 자원이 오로지 그 결핍을 메우는 데 집중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인지 대역폭(cognitive bandwidth)은 급격히 축소된다.
쉽게 말해, 눈앞의 급한 문제에만 매달리고 장기적이고 중요한 판단은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 결핍, 재정 결핍, 에너지 결핍, 어떤 형태든 결핍은 시야를 좁히고, 한정된 정신적 자원을 잠식한다. 그리고 이 터널링은 IQ를 평균적으로 10 이상 깎아내릴 정도로 사람의 사고능력을 떨어뜨린다. 결핍 그 자체보다 결핍이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더 치명적인 이유다. 이론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문제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터널 안에서는 항상 '지금 당장'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장기적인 이익보다 단기적인 해소를 선택하고, 문제를 미루고, 또 다른 결핍을 불러온다. 급한 불을 끄느라 정작 집 전체가 무너지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나는 끊임없이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왔다. 급한 이메일에 답장하고, 촉박한 마감에 허덕이고, 미루었던 업무를 틈틈이 메웠다. 그러나 그런 임시방편은 나를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덜 채우는 것"이었다.
여백. 느슨함. 빈틈.
<Scarcity>에서 멀레이너선과 샤퍼는 "결핍에 빠진 사람은 결핍 때문에 더욱 결핍에 빠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리를 끊는 방법 중 하나로 '느슨함(slack)'의 확보를 제안한다. 느슨함은 여유 자원, 즉 여분의 시간, 돈, 에너지 같은 것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느슨함을 비효율이라 취급한다. 병원은 모든 수술실을 풀가동하고, 기업은 직원들의 업무 시간을 빼곡히 채운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빽빽하게 짜인 시스템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세인트 존스 병원 사례가 그렇다. 모든 수술실이 가득 차 있는 병원은 응급 환자 한 명으로 인해 수술 스케줄 전체가 붕괴되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수술실 하나를 비워두는 것. 수술실 하나를 언제나 비워둠으로써 굳이 급하지 않은 수술까지 꽉꽉 채워넣는 무리한 스케줄은 사라졌고 갑작스러운 수술에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느슨한 공간이 병원의 전체 효율을 지켜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오래 생각했다. 혹시 나 역시, 나의 모든 시간을, 나의 모든 에너지를 빼곡히 채워넣은 채 살아오지 않았나. 그래서 아주 작은 예기치 못한 일에도 매번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때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빈칸처럼 남겨진 시간을 한 번쯤 가져보자는 결심이었다.
나는 아무 계획 없이 집에 있었다. 책을 읽지도 않았고, 영화를 보지도 않았고, 해야 할 일 목록도 펼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이 시간을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세상이 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했다. 마치 꽉 조여진 끈을 살짝 느슨하게 푼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되살려주고 있었다.
결국 느슨함은 낭비가 아니었다. 다시 숨 쉬기 위한 여백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채우려고 애쓴다. 더 많은 성과,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계획. 하지만 모든 것을 빼곡히 채운 삶에는 숨 쉴 틈이 없다. 작은 변수 하나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을 자책하며, 다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느슨함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당신의 하루는 얼마나 빽빽하게 채워져 있나요? 혹시 단 한 칸의 빈칸도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 하루, 아주 작은 느슨함을 만들어보세요.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을 미뤄도 좋고, 일정을 비워도 좋습니다. 텅 빈 시간을 불안해하지 말고 가만히 받아들여보세요.
그 느슨한 틈 사이로, 당신은 다시 숨 쉬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