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내 입과 내 행동을 억압해왔다. 이런 말은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어, 완벽해지기 전까지 이런 작업은 보여주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은 하찮아 보일 수도 있어. 나를 막아왔던 관계를 끊고 다시 억압된 것을 불러올 때, 나는 굉장히 예민해졌다.
프로이트는 익숙했던 것이 억압되었다가 다시 돌아올 때, 그것이 낯선 공포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무의식 속에 눌러둔 것들이 의식으로 올라오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기보다 불쾌하고 불안한 것으로 느낀다. 그래서 억압된 것은 종종 말끔한 고백이 아니라, 예민함이나 피로, 이상한 반복,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돌아온다. 내가 예민해진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예민해진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다시 손을 움직이고 싶어졌다. 머리로는 정리되지 않는 것들이 손에서는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실을 만지고, 매듭을 짓고, 형태를 잡고, 풀었다가 다시 묶는 동안 생각은 잠시 조용해진다. 나는 그 시간이 좋다. 아주 생산적인 인간이 된 것 같아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를 괴롭히던 말들이 손끝의 리듬 속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은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더 엉켜버리는데, 손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조금 덜 무서워진다. 그러니까 나에게 작업은 대단한 선언이라기보다, 흩어진 나를 다시 데려오는 아주 작고 끈질긴 방식이다.
이번에는 연꽃의 형태를 만들어보고 있다. 활짝 핀 꽃잎이 있고, 가운데에는 연봉 매듭으로 엮은 끈이 묶여 있다. 연봉. 연꽃 봉오리. 아직 피지 않은 꽃. 이미 완성된 꽃이 아니라, 막 피어나려는 상태. 사람들은 활짝 핀 꽃을 좋아하듯이 늘 활짝 핀 순간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완성된 작업, 정리된 생각, 괜찮아진 얼굴, 다 지나간 척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런데 실제의 삶은 대부분 봉오리에 더 가깝다. 아직 덜 열렸고,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아직 자신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태. 우리는 대부분 그런 상태로 살아간다. 활짝 핀 척하면서, 사실은 속으로 계속 피어나는 중이다.
연봉 매듭을 짓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매듭은 무언가를 묶어두는 일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흩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끊어지지 않도록, 잃어버리지 않도록, 너무 빨리 풀려버리지 않도록. 연꽃 봉오리를 닮은 매듭이라는 것도 그래서 좋다. 꽃이 피기 전의 시간을 묶어두는 것 같아서.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을 조용히 품고 있는 것 같아서. 모든 시작은 늘 조금 닫혀 있다. 처음부터 활짝 열린 시작은 거의 없다. 어떤 시작은 의심으로 닫혀 있고, 어떤 시작은 두려움으로 닫혀 있고, 어떤 시작은 귀찮음으로 닫혀 있다. 귀찮음도 꽤 강력한 진흙이다. 굉장히 현실적인 진흙. 수행자도 소파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 봉오리는 닫혀 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강한 일이 벌어진다. 꽃잎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서는 이미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도 그런 시간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고, 정체된 것 같고, 심지어 후퇴하는 것 같지만, 안쪽에서는 조금씩 무언가가 변하고 있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너무 쉽게 무시해왔던 것 같다.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아직 의미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떤 변화는 너무 깊은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빛도 소리도 없다. 그냥 축축하고 어둡고 답답하다. 딱 진흙 같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는 말은 아름다운 비유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 안에는 꽤 냉정한 진실이 있다. 깨달음은 깨끗한 곳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것들, 부끄러웠던 순간들, 억울했던 일들, 오래 눌러둔 감정들, 내가 나답지 못하게 굴었던 시간들 속에서 온다. 물론 고난이 자동으로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그냥 고난이다. 아프고, 짜증 나고, 피곤하고, 가끔은 사람을 아주 못나게 만든다. 고난이 찾아왔다고 해서 갑자기 근사한 깨달음이 선물 포장되어 도착하지는 않는다. 그런 시스템이면 얼마나 좋겠나. 고난 3회 적립 시 행운 1회 무료 증정.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서비스가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봉오리라는 상태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한다. 아직 피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니까. 아직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니까. 소망은 어쩌면 멀리 있는 완성된 꽃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닫힌 채로도 안쪽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을 믿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난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예민했는지, 왜 그렇게 아무것도 못 했는지, 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크게 흔들렸는지, 왜 어떤 장면을 계속 떠올렸는지. 나중에야 조금씩 알게 된다. 그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참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너무 오래 괜찮은 척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너무 오래 나답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관리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그걸 인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지나온 진흙을 너무 빨리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진흙은 진흙이다. 냄새도 나고, 무겁고, 빠져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뭔가를 배웠다면, 그건 이제 내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작업은 나에게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물론 장식물이다. 예쁘게 보이려고 만든 것도 맞다. 안 예쁘면 조금 곤란하다. 하지만 그 예쁨이 그냥 표면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빛이 꽃잎 사이로 새어 나오고, 연봉매듭이 가운데에서 조용히 형태를 잡고 있고, 바닥에는 12개의 술이 놓여 있는 이 작은 물건 안에, 내가 지나온 어떤 시간을 넣고 싶었다. 아직 다 피지 못한 나. 그래도 피어보겠다고 버티는 나. 진흙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빛을 만들고 있는 나. 그런 것을 넣고 싶었다.
빛이라는 것도 참 이상하다. 조명은 스스로 빛나는 것 같지만, 사실 안쪽에 숨겨진 전구나 작은 회로가 있어야 빛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꽃잎이고, 장식이고, 형태지만, 실제로 빛을 만드는 것은 안쪽의 보이지 않는 구조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겉으로 보이는 취향, 말투, 작업, 이미지, 결과물 뒤에는 보이지 않는 회로가 있다. 어떤 기억, 어떤 결핍, 어떤 욕망, 어떤 상처, 어떤 질문들. 그 회로가 엉켜 있으면 빛도 불안정하게 깜빡인다. 그런데 그걸 조금씩 들여다보고, 만지고, 고치고, 다시 연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들어온다. 아주 밝지는 않아도 된다. 일단 켜지면 된다. 꺼져 있던 것이 다시 켜지는 순간, 그걸로 충분한 날도 있다.
나는 요즘 다시 그런 생각을 한다. 완벽하게 괜찮아진 뒤에 시작하는 삶은 없다고. 다 정리된 뒤에 작업하는 사람도 없고, 다 치유된 뒤에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다 준비된 뒤에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대부분 덜 정리된 상태로 시작한다. 조금 찝찝하고, 조금 불안하고, 약간은 진흙이 묻은 채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깨닫는다. 아, 나 지금 조금 피고 있구나.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도 피고 있구나.
사랑은 지나온 진흙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진흙을 통과한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아직 다 피지 못한 나도. 조금 못나고, 조금 예민하고, 조금 늦더라도, 결국 빛나는 쪽으로 가고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
5월이 되었다. 부처님이 오신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등에 업고, 연휴를 보너스로 손에 든 채 “옛다” 하고 던져주러 오신다. 거리에는 연등이 걸리고, 계절은 슬슬 더워지고, 미뤄둔 일들은 더 이상 모른 척하기 어려워진다.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에 좋은 때다. 본격적으로 나를 다시 밝혀보기에 좋은 때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연꽃을 만든다.
진흙 속에서 올라온 꽃처럼,
아직 다 피지 않은 봉오리처럼,
묶였다가도 다시 열리는 매듭처럼.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고, 조금 뻔뻔하게.
그래도 결국 빛나는 쪽으로.
그리고 혹시나 이 모든 것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그냥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부처님 오신다. 연휴다.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