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업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감는 것이다.
감는다는 건 덮는다는 뜻 같지만, 사실은 쌓는다는 뜻에 더 가깝다. 표면 위에 시간의 층을 얹는 방식. 실은 한 줄이지만, 반복되면 면이 된다. 그리고 면이 계속 쌓이면 단순한 피복이 아니라 밀도가 생긴다. 나는 그 밀도를 좋아한다. 처음에는 헐겁고 가볍던 것이, 반복될수록 조금씩 의지를 갖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마치 이 표면이 자기만의 중력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두 번째는 텍스처다.
나는 하나의 실로 균일하게 감긴 표면보다,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실들이 모여 하나의 결이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굵기가 다르고, 탄력이 다르고, 빛을 반사하는 방식이 다른 실들이 한곳에 모이면, 표면은 단순히 덮이는 게 아니라 살아난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색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전부 다른 표정이 숨어 있다. 나는 그런 게 좋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것.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오래 볼수록 복잡해지는 것. 사람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도 대체로 그렇다.
세 번째는 리듬이다.
이 작업은 아주 많은 반복을 필요로 한다. 같은 자리를 계속 감고, 손의 방향을 유지하고, 장력을 맞추고, 틈을 메우고, 다시 이어간다. 언뜻 보면 지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복은 생각보다 지루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반복은 작은 차이를 감지하게 만든다. 같은 동작을 백 번 해도 백 번 다 다르다. 오늘 손끝의 힘이 어제와 다르고, 실이 당겨지는 각도가 조금 다르고, 빛이 닿는 방향도 다르다. 반복은 복제가 아니다. 반복은 차이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차이들이 쌓였을 때 비로소 표면은 캐릭터를 갖는다.
처음 몇 바퀴는 늘 어색하다. 표면이 아직 자기 얼굴을 정하지 못한 상태. 감긴 실은 여전히 실처럼 보이고, 나무는 아직 나무로 남아 있다. 둘이 섞이지 못하고 각자 따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나는 이 구간을 좋아하면서도 경계한다. 너무 서두르면 표면이 얕아지고, 너무 조심하면 에너지가 사라진다. 결국 이 단계에서는 결정보다 믿음이 필요하다. 아직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반복하면 어느 순간 결이 나타난다는 걸 믿는 것. 창작은 늘 그런 종류의 믿음을 요구한다. 아직 보이지 않는 걸 조금 먼저 신뢰하는 일.
조금씩 감기기 시작하면 의자의 성격이 바뀐다. 가구였던 것이 오브제가 되고, 오브제였던 것이 몸을 가진 존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아주 느리게 일어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한참 작업한 뒤에야 뒤돌아보며 알아차리게 된다.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표면이 바뀌면 존재감도 달라진다. 사람도 그렇다.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도, 어떤 시간을 통과했느냐에 따라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표면은 장식이 아니라 시간의 결과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앉는 자리다. 나는 이 부분을 그냥 덮고 싶지 않다. 평평한 면 위에 또 하나의 평평한 면을 얹는 건 충분하지 않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중심에서부터 계속 돌아나가본다. 또아리같은 이 모양을 보고 나무의 나이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는 시간을 겉에 쓰지 않는다. 안에 저장한다. 몇 번의 봄과 여름을 지나왔는지, 얼마나 천천히 자랐는지, 무엇을 견디며 굵어졌는지, 그 모든 건 안쪽에 쌓인다. 잘라보기 전까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그 구조가 좋다. 시간은 대체로 그렇게 존재하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쪽에는 분명한 층이 있다.
그래서 이건 커버가 아니라 단면에 가깝다. 앉기 위한 면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보여주는 원형. 마치 의자 위에 또 하나의 생장 구조를 얹는 기분이다. 이미 한 번 나무였던 것 위에, 손으로 만든 또 다른 나이테를 더하는 기분. 실제의 시간은 아니지만, 반복된 손의 시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몇 시간을 감았는지, 몇 번 숨을 고르고 손을 멈췄는지, 어디서 마음이 흐트러졌고 어디서 다시 집중이 돌아왔는지, 그런 것들이 이 원 안에 천천히 저장된다. 그래서 완성된 면을 보면 늘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만든 패턴 같기도 하고, 내가 지나온 시간의 압축본 같기도 하다.
하나는 흰색, 하나는 검은색. 같은 방식으로 만들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흰색은 늘 빛을 더 많이 품는다. 표면의 굴곡이 더 잘 드러나고, 실 사이의 공기까지 보이는 느낌이 있다. 가볍다기보다 열려 있다. 빛이 표면에 닿았다가 튕겨 나가는 방식이 명확해서, 같은 구조도 조금 더 호흡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검은색은 다르다. 형태가 안으로 모인다. 굴곡은 감춰지는 대신 깊이가 생기고, 질감은 더 천천히 드러난다. 가까이 가야 보이고, 오래 봐야 읽힌다. 검은색은 표면을 보여주기보다 눌러앉게 만든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응축된 시간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이 둘을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를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의 농도를 알 수 있고, 그림자가 있어야 빛의 윤곽도 선명해진다.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구조를 두 개의 감정으로 번역한 결과에 가깝다. 같은 문장을 다른 목소리로 읽은 것처럼. 같은 나무에서 시작했지만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갖게 된 것도 그래서 흥미롭다. 어떤 건 구조보다 표면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어떤 표면은 색보다 시간이 더 많은 것을 결정한다.
작업을 하다 보면 종종 생각한다. 왜 이렇게까지 반복하는 걸까. 왜 이렇게 느린 방식을 고집할까. 훨씬 빠른 방법도 있고, 더 쉽게 끝낼 수 있는 방법도 있고, 더 기능적인 결과를 만드는 방법도 분명 있다. 그런데도 손으로 감는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아마 이것이 결과만이 아니라 시간을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방법은 형태를 얻을 수 있게 해주지만, 느린 방법만이 밀도를 남긴다. 나는 완성된 물건보다 완성되어 가는 시간에 더 관심이 많다.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어떤 리듬으로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실을 감는 동안에는 묘한 집중이 생긴다. 아주 큰 감정은 아니지만 분명한 몰입.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언어가 앞서지도 않는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눈이 표면의 변화를 따라가고, 생각은 그 뒤를 아주 천천히 따라온다. 나는 그 상태를 좋아한다.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무언가와 함께 리듬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창작이 늘 표현만은 아니라는 걸 이런 순간에 실감한다. 어떤 날은 창작이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듣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재료가 어느 정도의 장력을 원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숨을 쉬고 싶은지, 어느 순간 표면이 더 이상 추가를 원하지 않는지.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은 조금 이상하다. 그렇게 오래 반복했는데도, 끝은 늘 갑자기 찾아온다. 어느 순간 더 감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이상은 과하겠다는 감각. 더 덮는다고 더 좋아지지 않는다는 판단. 창작에서 가장 어려운 건 시작보다 끝인지도 모르겠다. 충분함을 알아보는 일. 멈춰야 할 순간을 아는 일. 나는 그 판단이 늘 어렵다. 그래서 한참을 바라본다. 빛을 바꿔보고, 각도를 달리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조금 멀리 떨어져 보기도 한다. 완성은 형태가 아니라 거리에서 결정될 때가 많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끝낼 수 없고, 한 걸음 물러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을 발견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 안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결을 찾고, 기능만 남은 표면에 다시 시간을 얹고, 정리된 물건 안에 남아 있는 재료의 기억을 불러내는 사람. 그렇다면 내 작업은 추가가 아니라 회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더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되돌리는 일. 가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시 보이게 하는 일.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 실을 감는다. 문장으로 쓰면 단순하다. 하지만 그 단순한 문장 안에는 꽤 많은 시간이 들어 있다. 반복한 손의 감각, 재료를 바라본 시선, 망설인 순간, 밀도를 선택한 판단, 멈추기로 한 타이밍. 결국 표면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표면은 시간의 결과다. 좋은 표면은 언제나 그 안에 시간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는 층이 있고, 오래 보면 읽히는 결이 있고, 만졌을 때만 알 수 있는 밀도가 있다.
나는 창작이 늘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이미 존재하는 것 안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결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작업도 그렇다.
나는 의자를 덮은 게 아니다.
그 안에 남아 있던 시간을 다시 꺼낸 거다.
이것은 의자도 나무도 아닌,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