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생각을 하다가, 제가 작업할 때 자주 빠지는 함정과도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뭔가 만들고 싶은데 시작을 못 할 때가 있잖아요. 머릿속에는 이미 너무 좋은 게 있어요. 아주 기가 막힌 결과물이 있어요. 인터뷰하면 뭐라고 말할지까지 준비됐어요. 아직 만들지도 않았는데요. 그런데 손은 안 움직여요. 왜냐하면 시작하면 현실이 되니까. 현실이 되는 순간, 머릿속의 완벽함은 깨지거든요. 뜨개질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디자인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시작하면 내 한계가 보여요. 어제보다 손이 둔할 수도 있고, 생각보다 감이 안 올 수도 있고, 체력이 형편없을 수도 있어요. 그게 싫은 거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시작 대신 전망을 사랑해요. 해내는 상상, 성공하는 이미지, 잘 풀리는 미래. 그러니까 ‘되겠지’는 가끔 희망이라기보다 유예예요. 오늘 내가 굳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언젠가 좋아질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
얼마 전에 릭 루빈의 책을 다시 들춰봤어요.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이 책은 창작 기술만 말하는 책은 아니에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감각을 열어두는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루는지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죠. 저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되게 많은 문장에 밑줄을 치게 되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세부 문장보다 어떤 태도만 남아요. 결국 해보라는 거예요. 감각을 믿든, 우연을 열어두든, 잡음을 견디든, 실패를 포함하든, 어쨌든 해보라는 것.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너무 당연한 진실. 그런데 우리는 그 당연한 진실을 맨날 잊어버리죠. 저도 그래요. 진짜 웃긴 게 뭔지 아세요? 행동을 미루는 사람일수록 방법론에 대한 수집은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저예요. 방법만 모으면 거의 논문 나와요. 아침 루틴, 집중법, 몰입 환경, 창의성, 도파민 관리, 인지 부하, 습관 설계. 그런데 그 많은 방법이 내 하루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더라고요. 너무 야박하죠. 찾아볼 수 있는 지식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내 인생은 아직도 수동으로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지.
사무엘 베케트의 문장도 그래서 오래 남는 것 같아요.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이 문장들이 인상 깊은 이유는 실패를 찬양해서가 아니라, 반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에요. 한 번에 완성되는 인생 같은 건 없다는 걸 너무 담담하게 말해주잖아요. 우리는 자꾸 한 번의 시도로 자기 전체를 판결하려고 해요. 한 번 해봤는데 별로였다. 나는 아닌가 보다. 포스팅 한 번 올렸는데 반응이 없다. 이건 아닌가 보다. 일주일 운동했는데 변화가 없다. 역시 체질이 아니네. 그런데 뭐든 진짜로 자기 것이 되는 건 대개 여러 번의 어설픔을 통과한 뒤더라고요. 습관과 반복을 다루는 신경과학 연구들을 보면, 처음 어떤 행동을 시작할 때는 전전두엽처럼 계획하고 판단하는 영역의 개입이 크지만, 같은 행동이 반복되면 점점 기저핵을 포함한 피질-선조체 회로 쪽으로 처리 부담이 이동한다고 해요. 쉽게 말하면, 매번 거창하게 결심해서 움직이는 방식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행동의 진입 비용을 낮추는 쪽으로 뇌가 학습한다는 거예요. 습관이 생긴다는 건 내가 갑자기 더 강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마찰이 줄어든다는 뜻에 더 가깝죠. 위로가 좀 되지 않나요? 내가 매번 대단한 각오를 못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 처음에는 의지로 문을 열어야 하지만, 반복이 쌓이면 나중에는 문고리를 잡는 일이 훨씬 쉬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행동을 돕는 건 의욕만이 아니더라고요. 심리학에서는 ‘실행 의도’라는 개념이 있어요. 막연하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일 아침 8시에 책상에 앉으면 바로 초안 10줄을 쓴다”처럼 상황과 행동을 연결해두는 방식이 실제 행동 개시를 더 잘 돕는다는 연구들이 반복해서 발표되고 있어요. 우리는 보통 삶이 바뀌는 순간을 거대한 결심에서 찾는데, 실제로는 추상적인 의지보다 구체적인 접속 문장이 더 쓸모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나는 열심히 살 거야’보다 ‘작업대 앞에 앉으면 10분만 실을 잡는다’가 더 강한 문장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해보자는 말은 막연한 기합이 아니라, 뇌가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형태로 삶을 번역하는 일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부터 제 안의 문장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대신 ‘어떻게든 해보자.’
별 차이 없어 보이죠? 그런데 저는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되겠지’는 ‘내’가 없는 문장이고, ‘해보자’는 ‘내’가 들어가 있는 문장이에요. 결과를 장담하는 말도 아니고, 무조건 잘될 거라는 허세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빠지지 않겠다는 말. 나는 적어도 이 장면에 참여하겠다는 말. ‘어떻게든 해보자’는 말에는 현실감이 있어요. 막 반짝이지도 않고, 열정이 넘치지도 않고, 오히려 조금 지쳐 있는 사람도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이를 악물고 반드시 해내겠다, 이건 너무 무거울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든 해보자, 이건 조금 헐렁해서 좋아요. 숨통이 있어요. 망해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 것 같고, 엉망이어도 일단 앞으로는 가는 느낌. 저는 요즘 이 문장이 좋더라고요. 우아하진 않지만 생존에는 유용한 태도. 고급스럽진 않아도 강한 태도. 인생은 때로 명언보다 잡기술이 필요하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작업이 도저히 안 풀리는 날이 있어요. 아무리 봐도 손이 안 가고, 뭘 해도 촌스럽고, 갑자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싶고, 내 눈에 내 작업이 제일 재미없어 보이는 날. 그런 날 있잖아요. 그럴 때 예전의 저는 ‘오늘은 아닌가 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멀어졌어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게 해요. 어떻게든 해보자. 그러면 아주 거창한 걸 하지 않아도 돼요. 샘플 하나만 더 떠본다든지, 실 정리만 한다든지, 메모만 남긴다든지, 작업대에 10분만 앉아본다든지. 이게 되게 사소해 보여도 다르더라고요. 내가 이 장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아요. 이게 중요해요. 자기 신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요. 나는 대단한 인간은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해보는 인간이다. 이런 자기 평판은 생각보다 오래 가요.
운동도 비슷했어요. 제가 러닝 얘기 예전에도 했잖아요. 기록을 내겠다는 마음보다, 내 페이스를 찾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면서 훨씬 오래 가더라고요. 예전에는 한 번 못 뛰면 괜히 흐름이 끊긴 것 같고, 다 망한 것 같고, 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이상하죠. 사람은 왜 이렇게 자기 인생을 자꾸 시즌 종료시켜버리는지. 화분에 물 하루 못 줬다고 식물이 제게 내용증명을 보내진 않는데, 저는 혼자 속으로 프로젝트 종료를 선언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든 해보자 쪽으로 바꾸고 나니까 오늘 5킬로를 못 뛰어도 15분은 걸을 수 있더라고요. 밖에 나가기 싫으면 집에서 스트레칭이라도 할 수 있고요. 완벽한 루틴은 아니지만, 관계는 이어집니다. 운동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요.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뭐든 결국 관계의 문제 같거든요. 작업과의 관계, 몸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한 번의 성과보다, 그 관계를 끊지 않는 편이 훨씬 멀리 가게 해요.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니 저는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 떠오르더라고요. “얼굴 빼고 모든 게 다른 쌍둥이 자매가 인생을 맞바꾸는 거짓말로 진짜 사랑과 인생을 찾아가는 로맨틱 성장 드라마”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도 결국 행동이에요.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던 미지와 미래가 자리를 바꿔 살아보면서, 말로만 이해하던 고통이 몸으로 겪는 현실이 되잖아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누가 더 옳으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자기 삶 안으로 다시 들어가느냐예요. 특히 미지는 과거의 부상과 상처 때문에 멈춰 있던 사람이었고, 미래는 겉으로는 안정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서로의 삶을 통과해보는 그 선택 하나가, 두 사람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어요. 가만히 설명만 하던 사람에서, 자기 몫의 장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으로요. 저는 이게 좋았어요.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 늘 대단한 성공이나 각성으로 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일단 내가 이 장면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는 선택으로 시작된다는 점이요.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자꾸 준비가 끝난 다음에 살아보려고 하잖아요. 상처가 다 정리되면, 자신감이 생기면, 상황이 안정되면, 그때 제대로 시작하겠다고요. 그런데 <미지의 서울>은 그 순서를 조금 바꿔 보여줘요. 상처가 정리된 뒤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동안 비로소 자기 상처의 모양을 알아차리게 되는 사람들. 완전히 준비된 사람만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채로도 한 걸음 들어간 사람이 자기 인생을 다시 써나가는 이야기. 바로 이런 모습이 “어떻게든 되겠지”보다 “어떻게든 해보자”는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이 알아서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서툴더라도 내가 다시 내 삶의 장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죠.
또 한편으로는, 이 능동적인 태도가 무조건 씩씩함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걸 꼭 말하고 싶어요. 저는 ‘어떻게든 해보자’가 근육질의 문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좀 너덜너덜한 문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아주 멋진 상태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말. 자신감이 넘치지 않아도, 오늘 하루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여전히 할 수 있는 말. 계속 해보면서 싫증도 났다가, 다시 흥미로워지기도 하고, 다 내려놓고 싶다가도, 다시 작업대에 앉게 되는 날들. 저는 오히려 그런 반복이야말로 진짜 삶의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늘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좋아하는 일도 질리고요, 의미 있는 일도 귀찮고요, 사랑하는 대상도 때로는 피곤해요. 그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관계가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파도처럼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거죠. 늘 평온한 바다는 사진으로는 예뻐도 항해는 지루할 수 있잖아요. 물론 너무 큰 파도는 사절입니다. 저도 낭만은 좋아하지만 멀미는 싫어요.
재밌는 건,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나니까 행운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운이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 운은 내가 만들 수 없는 영역이 맞아요. 그건 인정해야죠. 그런데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운이 들어올 틈도 없더라고요. 아무것도 올려두지 않은 작업대에는 우연히 와서 걸릴 것도 없잖아요. 아무 말도 안 건넨 사람에게 우정이 깊어지기는 어렵고, 아무 시도도 안 한 사람에게 결과가 생기기도 어렵고요. 그러니까 행운이라는 건, 통제할 수는 없지만 맞이할 자세는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창문은 내가 열 수 있잖아요. 바람이 들어올지는 모르지만, 창문은 열 수 있어요. 저는 이 정도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전부를 통제하겠다는 오만도 아니고, 전부를 운에 맡기겠다는 체념도 아닌 상태.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내 몫을 하는 거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대단한 자기계발론이 아니에요. 이를 갈고 버티라는 말도 아니고요. 그냥 문장 하나를 바꿔보자는 얘기예요. 어떻게든 되겠지, 대신 어떻게든 해보자. 그 말 하나만으로 세상이 갑자기 친절해지진 않을 거예요. 마감이 사라지지도 않고, 통장 잔고가 감동적으로 불어나지도 않을 거고, 내 안의 게으름이 개과천선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장면의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될 수 있어요. 그 차이가 저는 꽤 크다고 생각해요. 내 삶의 결정권을 전부 외부에 넘기지 않는 것. 결과는 모르더라도 태도만큼은 내가 붙잡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내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쥐고 살아가는 방법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오늘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완벽한 시작 같은 건 대개 없고, 괜찮은 결과는 생각보다 지저분한 과정에서 나오고, 삶은 자주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볼 수 있잖아요. 아주 작게라도요. 메모 한 줄을 쓰는 것, 산책을 나가는 것, 작업대 앞에 다시 앉는 것. 그 작은 동사 하나가 오늘의 나를 조금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날들이 쌓이면, 어느 날 뒤를 돌아봤을 때 내가 전보다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요. 막 엄청난 성공 신화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는 내 삶에서 자주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사실. 저는 그거면 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아마 흔들릴 거고, 귀찮아할 거고, 가끔은 또 현실 도피성 낙관주의자가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때마다 한 번쯤 다시 말해보려고요. 어떻게든 되겠지 말고, 어떻게든 해보자. 잘하려고만 하지 말고, 일단 해보자. 완벽하려고만 하지 말고, 관계를 끊지 말자. 결정권을 자꾸 바깥에 넘기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쪽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여보자.
우리 너무 대단해지려고 애쓰진 말고요,
대신 조금 더 참여해봅시다.
나의 삶에
나의 하루에
그리고
나의 마음에
어떻게든 해봅시다.
행운을 빌어요.
🕊️공지가 하나 있습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3월의 마지막 뉴스레터예요.
4월부터는 좀 더 재밌는 이야기를 가지고 격주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