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보게 됐어요. 효율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나? 이 질문이 자꾸 떠오르는 건, 제가 하는 작업이 효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해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시간과 에너지와 비용을 계산하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안 하는 게 맞다”가 결론인 순간이 많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 ‘안 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들으면서도 계속 해요. 이게 제일 이상하죠. 그럼 왜 하냐. 결국 남는 건 뻔해요. 돈으로 딱 치환이 안 되는 어떤 것들. 이를테면 마음, 감각, 관계, 기억. 그런 것들이요.
요즘은 “이게 의미가 있어?”라는 질문이 “이게 돈이 돼?”와 겹칠 때가 많잖아요. 우리가 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되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서 더 무섭고요. 사람의 뇌는 원래 에너지를 아끼는 쪽으로 움직이니까요. 다니엘 카너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빠른 판단을 위해 자동 모드로 살아요. 깊게 생각하는 건 비용이 들고 피곤하니까요. 그러니까 효율을 찾는 건 뇌의 기본값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 기본값이 ‘가치 판단’까지 장악할 때예요. 효율적이지 않은 건 시간 낭비, 의미 없음, 쓸모 없음. 그렇게 딱지 붙는 순간, 느린 것들은 죄책감이 붙어요. 멍 때리는 것도 죄책감, 아무 목적 없이 걷는 것도 죄책감, 친구랑 수다 떠는 것도 죄책감. 심지어 쉬는 것도 “이 휴식이 나한테 도움이 되나”를 평가할 때가 있죠. 휴식 평가하는 사람. 저예요.
요즘은 연애에서도 효율을 따지는 말이 너무 많아요. “시간 낭비하지 말자” “감정 소모 줄이자” “가능성 없는 사람에게 에너지 쓰지 말자.” 다 맞는 말이죠. 근데 그 말들이 너무 완벽하게 맞아서 문제예요. 맞는 말은 사람을 쉽게 설득하거든요.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 중에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이라는 게 있는데, 웹툰이 원작이라고 하더라고요. 제목부터 효율이 들어간 웹툰, 드라마가 있는 것도 그냥 우연이 아니라 시대의 표정 같고요. 효율적 만남, 효율적 관계. 그런데 관계라는 게 원래 비효율의 집합이잖아요. 오해하고, 삐지고, 풀고, 다시 삐지고. 한 번에 깔끔하게 업데이트되는 관계는 없어요. 그 과정이 귀찮고 비효율적인데, 그 비효율이 친밀함을 만들어요. 효율만 따지면 관계는 ‘유지 비용’이 되고, 사람을 프로젝트처럼 관리하게 돼요. 연애를 KPI로 관리하는 순간, 사랑은 되게 억울해집니다. “나를 좋아한다며, 왜 나를 보고 평가표를 들고 있어?” 이런 느낌을 받게 되죠.
저는 이 얘기를 하면서 좀 민망해요. 왜냐면 저는 ‘효율’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계획대로 되는 걸 좋아하고, 실패를 줄이는 걸 좋아하고, 시간을 쪼개 쓰는 걸 잘해요. 그런데 동시에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도 그거예요. 제 안에 “효율 담당자”랑 “의미 담당자” 두 명이 살고 있어요. 효율 담당자는 늘 말하죠. “그거 해서 뭐가 남아?” 의미 담당자는 늘 반박을 합니다. “뭐가 꼭 남아야 해?” 지킬 앤 하이드 아니에요.
근데 요즘 내 안에서 이 둘의 싸움이 더 생생해진 계기가 하나 있어요. 제가 최근에 매듭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매듭은 해보니까 “효율의 욕심을 내는 순간 바로 망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빨리 하려고 손에 힘이 들어가면 끈이 바로 꼬입니다. 모양도 납작해지고, 한쪽이 비뚤어지고, 당김이 일정하지 않아서 매듭이 뭔가 불안한 모양이 되어버려요. 그럼 어떻게 되냐. 결국 다시 풀어요. 다시 만들어요. 그러니까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 뭐냐면, 아이러니하게도 ‘천천히 하는 것’이에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손과 재료가 맞아들어가는 리듬을 익히는 것. 이게 맞더라고요.
매듭을 하면서 제가 깨달은 게 있어요. 효율만 생각하면 머릿속 질문이 바로 바뀌어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지?” “이 과정을 생략할 수 있나?” “손이 좀 덜 가는 방법 없나?” 근데 매듭이 저한테 묻는 질문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매듭은 이런 걸 묻는 느낌이에요. “지금 힘이 어디로 들어갔지?” “이 끈은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지?” “당김이 일정했나?” “마찰이 생기는 지점이 어디였나?” 이건 ‘생산’이 아니라 ‘감각’에 대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매듭은 그냥 작업이 아니라, 손으로 하는 인지 실험 같아요. 내가 ‘서두르는 인간’인지, ‘안정시키는 인간’인지, ‘통제하려는 인간’인지가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매듭 앞에서는 성격이 아니라 습관이 적나라하게 보여요. 매듭장 보유자이신 노미자 선생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 “범석 씨는 성격이 좀 급해요?” 저요? 네, 급한 편입니다. 순살이 됐어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요. 저는 매듭을 “빨리 많이 만들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에요. 그게 목적이면 저는 아마 더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찾았겠죠. 공장을 찾아본다거나 공산품을 싸게 수급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아본다거나. 근데 제가 진짜 원하는 건 손의 감각을 익히는 거예요. 재료와 더 친해지는 거요. 그래서 언젠가 정말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해나가는 거. 그 길을 가려면 기꺼이 비효율적이 되어야 하더라고요. 여기서 이 표현이 되게 중요해요. ‘비효율을 감내한다’고 말하면 억지 느낌이 나는데, 저는 ‘비효율을 선택한다’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선택하는 순간, 풀고 다시 만드는 시간은 실패가 아니라 이 기술을 연마하고 익혀나가는 과정의 일부가 돼요. 풀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나만의 작품으로 향하는 길이 되는 거죠.
이게 뇌의 학습 방식하고도 닮았어요. 우리가 뭔가를 배울 때 뇌는 예측하고, 틀리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업데이트하잖아요. 오류가 생길 때 학습이 일어나요. 손기술은 특히 더 그래요. 머리로 이해하는 속도보다 손이 이해하는 속도가 느려요. 손은 단어가 아니라 촉감으로 배우니까요. 그러니까 서두르면 단계 확인이 생략되고 오류가 늘고, 결국 되돌리기가 많아져요. 매듭에서 “빨리 하려다 다시 푸는” 경험은 너무 정상적인 학습 과정이에요. 나의 뇌가 업데이트 중인 거예요. 망한 게 아니라, 배우는 중인 거예요. 이 관점 하나만 바뀌어도 작업할 때 마음이 덜 험해져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는 사람이 기계에 끼여 들어가듯 움직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르는 코미디인데, 요즘 보면 약간 다큐 같기도 해요.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많이. 그리고 기술이 들어오면서 그 속도는 더 올라가죠. 영화 <Her>를 보면, 기술이 우리를 더 친밀하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어떤 외로움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편해졌는데 마음 한켠이 쓸쓸한 지점. 저는 요즘 효율 얘기를 할 때 그 감정이 꼭 따라와요. 편해졌는데 슬프다. 이라는 모순을 느껴요.
그래서 저는 요즘 이렇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효율은 나를 도와주는 비서지, 나를 평가하는 상사가 아니라고. 효율은 내 삶을 편하게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내 삶의 의미를 판정할 권한까지 주면 안 돼요. 효율은 “이걸 더 빠르게 할 수 있다”를 말해주지만, 의미는 “이걸 왜 하는지”를 말해줘요. 둘 다 필요해요. 근데 요즘은 효율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의미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아요. 의미는 원래 아주 작게 들리거든요. “나는 이걸 좋아해.” “나는 이 사람과 있고 싶어.” “나는 이걸 만들고 싶어.” 이렇게 속삭임처럼 와요. 반대로 효율은 확성기처럼 들려요. “그거 해서 뭐가 남아?” “그거 하면 시간 손해야.” “더 좋은 방법 있어.” 확성기랑 속삭임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는 뻔하죠. 그래서 속삭임을 일부러 보호해줘야 해요. 그게 오늘의 핵심이에요.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어요.
“전문가는 아주 좁은 영역에서 가능한 실패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이 말이 좋은 건, 실패를 피하는 게 능력이 아니라 실패를 통과하는 게 능력이라는 방향으로 우리를 돌려놓기 때문입니다. 뜨개도 그렇고 매듭도 그래요. 처음엔 실을 너무 세게 당겨서 모양이 딱딱해지고, 그 다음엔 너무 느슨해서 무너지고, 무늬를 헷갈려서 중간이 엉망이 되고. 그런 걸 다 겪고 나면 손이 알아서 조절을 하기 시작해요. 손이 경험을 기억하는 거죠. 그 기억이 실력이 돼요. 관계도 마찬가지죠. 친구랑 싸웠던 기억, 연인이랑 오해했던 기억. 불편하긴 한데, 그 불편함이 다음을 만들어요. 효율만 앞세우면 그 데이터 수집을 중단해버립니다. 실패를 비용으로만 보면, 배움의 경로 자체가 끊겨요. 그러면 안전하지만 얕은 자리에서 맴돌게 돼요. 익숙하지만 답답하겠죠?
저는 거창한 결심을 권하고 싶진 않아요. 거창하면 또 효율 담당자가 막 신나서 날뛰거든요. “오, 시스템화 가능” 이러면서. 싫어요. 대신 아주 작게, ‘비효율 5분’을 허용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어요. 결과가 없어도 되는 5분. 성과가 없어도 되는 5분.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려도 되고, 아무 목적 없이 메모를 해도 되고, 물 끓는 거 멍하니 봐도 돼요. 그 5분 동안만큼은 “이게 의미가 있어?”라는 질문을 잠깐 금지해보는 거예요. 대신 이렇게 물어보는 거죠.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나?” “지금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지나?” 이 질문들은 효율표에 안 들어가요. 하지만 삶에는 들어가요.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믿어요.
매듭을 하다 꼬였을 때, 저는 처음에는 바로 스트레스가 올라오더라고요. 손에 힘도 잔뜩 들어가게 되고요. “아, 또 망했네.” 근데 이제는 이렇게 바꿔 말해보려고 해요. “아, 내가 급했구나.” 꼬였다는 건 재료가 제게 보내는 알림 같더라고요. ‘지금 속도가 네 마음이랑 좀 안 맞는 것 같아.’ ‘지금 힘이 과하다.’ ‘지금은 통제가 아니라 조율이 필요해.’ 그 알림을 듣고 다시 풀고 다시 만드는 시간이, 나와 재료가 친해지는 시간이에요. 그리고 그 친해지는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 제가 만들고 싶은 작품에 가까워지겠죠. 저는 그게 좋아요. 빠르게 많이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깊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만들고 있는 건 작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 손의 세계고 제 감각의 지도거든요.
기꺼이 비효율을 선택하는 것, 그게 내가 애정하고 아끼는 무언가의 증거 아닐까요?
우리는 진짜 소중한 것 앞에서 자주 비효율적이잖아요.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실패하고, 다시 돌아오고.
그 바보 같은 시간이 결국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효율적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히려 효율적이지 않아서 더 의미가 생기는 것도 있어요.
"당신이 기꺼이 비효율을 감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